[김영삼 서거]불세출의 '정치9단' YS가 남긴 공과 과
by김정남 기자
2015.11.22 14:08:32
YS이기에 가능했던 금융실명제 도입·경제개발계획 폐기
외환위기 당시 보였던 '우왕좌왕' 리더십은 큰 오점 남아
|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한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고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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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정치9단’이었다. 정치적 결단을 통해 난제를 뚝딱 해치우는 승부사 기질은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도입은 ‘YS가 아니었으면 하지 못했을’ 개혁으로 꼽힌다. 그는 어떤 대통령들보다 개혁의 판을 크게 벌렸고 또 실제 상당수 성공했던 ‘개혁 대통령’이었다.
다만 그에겐 외환위기를 부른 ‘실패한 대통령’ 꼬리표도 동시에 따라붙는다. 1990년대 세계경제의 급격한 변화에 차분하고 우직하게 대응한 게 아니라 일거에 경제 침체를 걷어내려 했던 게 패착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22일 오전 10시56분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이명박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의 빈소로 들어서서 상주를 자처한 김수한 전 국회의장(김영삼 대통령 기념사업회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과 마주했다.
화제는 YS식(式) 개혁이었다. 김 전 의장이 “오랜 군사통치의 종국을 찍는 하나회 청산은 그야말로 용기없이는 못 한다”고 하자, 이 전 대통령은 “그건 YS만이 할 수 있었다”고 거들었다.
김 전 의장은 재차 “금융실명제도 그렇고 그런 큰 역량이 없으면 못 한다”고 했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는 일본도 못 하고 있다”면서 “일본 정상들을 만나면 자기들은 그걸(금융실명제) 하겠다고 하는데 아직”이라고 했고, 김 전 의장은 “불이익을 각오하고 결단한 것”이라고 했다.
고건 전 총리도 이날 오전 11시35분 빈소를 찾아 “정치인으로서 YS를 얘기하는데, 사실 문민정부 때 금융실명제와 규제개혁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행정의 달인’으로 불린 고 전 총리조차도 YS의 결단을 언급한 것이다.
YS의 정치력은 ‘3당 합당’ 민자당의 대선 후보에 오른 것부터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한 것이었다. 1990년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박철언 전 의원 같은 군사정권 세력의 견제에도, 결국 이를 넘어섰다. YS의 말마따나 “호랑이 굴에서 호랑이를 잡은” 것이다. 35년 야당 정치인은 일거에 여당 대선후보로 탈바꿈했다.
이렇게 대통령에 올랐으니 YS의 재임 초는 불보듯 뻔했다. 모든 목표는 ‘군사정권 지우기’에 맞춰져 있었다. 1993년 8월12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한 방에’ 실시된 금융실명제도 그런 측면이 있다.
금융실명제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이 모두 거론했다가 실패한 정책이다. 1982년 이철희 장영자 어음 사기사건이 그 단초였다. 하지만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적 경제적 반발이 너무 거셌다. 특히나 집권층까지 나서 ‘정치자금 유지’ 등을 거론하며 반대했고, 금융실명제는 결국 ‘없던 일’이 됐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금융실명제는 YS가 반드시 해야 할 부정부패 척결 개혁과제로 꼽혔고, 별다른 의견수렴 절차도 없이 전광석화처럼 해치워버렸다. 금융거래를 남의 이름으로 못 하도록 한 이 개혁은 우리나라 전반의 시스템을 한단계 높인 초석으로 평가 받는다.
군사정권의 산물인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폐기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YS는 그 대신 신(新)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새로 만들었다. 군시정권 경제개발의 선봉에 섰던 경제기획원도 재무부와 통합됐다.
하지만 YS의 전반적인 경제정책에 높은 점수를 주긴 어렵다. 기득권의 저항을 일거에 깨는 결단은 능했지만 대내외의 급격한 변화에 꾸준히 대처하는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다.
YS의 집권 시절은 곧 ‘국경없는 경제전쟁’의 서막과도 같았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의 이행을 감시하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 게 1995년 1월이었다. WTO를 기반으로 다자가 경쟁하는 새로운 무역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YS에게는 이전 군사정권의 개발연대식 정책과는 차별화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YS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집권시 ‘세계화(Segyewha)’를 강조한 게 대표적인 예다. YS가 세계화의 영문표기를 ‘Globalization’이 아닌 ‘Segyewha’로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다만 문민정부의 방점은 경제보다는 군사정권 종식이라는 정치에 더 기울었다는 지적이 많다.
그 사이 우리경제는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었고, 결국 1997년 1월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대기업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본격 폭탄은 그해 말 터졌다. 우리나라 신용평가 하향조정을 시발점으로 달러가 외환시장에서 급격히 빠져나간 것이다. 말그대로 ‘패닉’ 상태였고, 급기야 국제통화기금(IMF)에 ‘SOS’를 치기에 이른다.
외환위기를 YS의 책임만으로 돌리긴 애매하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불기 시작한 당시는 글로벌 경제의 구조 자체가 바뀌던 시절이다. 우리 경제가 무너진 것도 군사정권부터 누적된 문제점들이 한방에 터진 것이란 관측이 상당하다.
그럼에도 YS가 외환위기 때 보인 ‘우왕좌왕’ 리더십은 위기를 더 키웠다는 냉정한 지적도 엄연히 있다. 단칼에 개혁을 성공시키는 승부사의 기질을 YS의 임기 말에는 찾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