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10년..한국만 '가계빚 성장' 외길 갔다
by박종오 기자
2018.09.26 15:00:00
| 금융 소비자들이 지난 18일 서울시내 한 은행 창구에서 상담을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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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만 주요 선진국 등과 다른 성장 경로를 밟아온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나라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빚을 늘리며 성장을 이끌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는 곳간을 잠그고 가계만 빚을 대폭 늘린 것이다.
26일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국가를 포함한 선진국과 신흥국 등 세계 70개국의 국내총생산(GDP)에서 가계·기업(금융회사 제외)·정부 부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당시인 2008년 9월 195.7%에서 올해 3월 현재 237.6%로 41.9%포인트 급증했다. 각 경제 주체가 떠안은 빚 부담이 전체 소득의 약 2배에서 2.4배가량으로 늘어났다는 의미다.
눈에 띄는 것은 금융위기 당시 직격타를 맞은 가계의 부채가 정부로 옮겨가는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2008년 58.4%에서 올해 59.5%로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했지만, 같은 기간 정부 부채 비율이 59%에서 86.8%로 크게 불어난 것이다. 이는 금융위기의 도화선이었던 미국 등의 부동산 거품이 꺼지며 가계가 혹독한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각국 정부는 구제 금융 자금을 투입하거나 경기 부양을 위해 적극적으로 재정을 풀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IIF가 집계한 세계 각국 정부의 부채 잔액은 지난 3월 현재 66조5000억 달러로 2008년(36조 달러)보다 30조 달러나 늘었다. 허리띠를 졸라맨 가계를 대신해 정부가 대규모 재정을 경제 위기 극복에 투입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걸어온 길은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금융위기 이후 최근까지 정부 부채는 찔끔 늘고 가계 부채가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빠르게 증가한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국제결제은행(BIS) 통계를 보면 한국의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올해 1분기 현재 95.2%로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3분기(73.9%)보다 21.3%포인트나 늘어났다. BIS의 전체 조사 대상 43개국 중 중국, 노르웨이, 태국, 스위스 다음으로 가계 부채가 많이 증가한 것이다.
반면 이 기간 43개국의 평균 가계 부채 비율은 0.7%포인트 늘어나는 데 그쳤다. 선진국의 경우 금융위기 이후 지난 10년 사이 GDP에서 가계 부채가 차지하는 비중이 오히려 1.9%포인트 감소했다.
그러나 정부 부문은 사정이 확연히 달랐다. 금융위기 발발 후 현재까지 43개국의 평균 정부 부채 비율이 27.4%포인트나 늘어났지만, 한국은 그에 크게 못 미치는 16.8%포인트 증가에 그친 것이다.
금융 당국 고위 관계자는 “미국 등 주요국에서 가계가 빚을 대폭 줄이는 고통을 감수하는 대신 정부가 적극적으로 재정을 투입해 위기를 극복한 반면, 우리나라는 반대로 대출 규제 완화 등을 통해 가계 빚을 늘려 부동산 경기를 띄우는 질 나쁜 성장을 추구한 결과”라고 반성했다.
정부가 2014년 8월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주택 대출 규제를 완화한 후 지방에서 서울로 부동산 시장 과열이 번진 것이 대표적이다. 반면 당시 정부는 소득공제 제도의 세액공제 전환, 법인세 비과세·감면 축소, 담뱃세 인상 등 증세 정책으로 나라 곳간을 탄탄하게 하면서도 재정 지출에서는 소극적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정부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통합재정수지’는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에만 17조6000억원 적자를 내고 이후 매년 최소 균형 재정 수준을 유지하거나 10조원이 넘는 대규모 흑자를 기록했다. 미국 정부가 2008년 3분기 GDP의 64.6%에 불과했던 정부 부채를 현재 99.6%까지 대폭 늘리는 적극적인 재정 운용으로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려 한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의 가계 부채는 소득보다도 훨씬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이 최근 공개한 금융안정상황(2018년 9월) 자료를 보면 2009~2016년 한국의 가계 부채 증가 속도(부채 증가율-소득 증가율)는 3.1%포인트였다. 이는 같은 기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0.4%포인트의 7.8배에 달하는 것이다. 국민 1인당 가계 빚(자영업자의 사업자 대출을 제외한 가계신용 기준)은 올해 2분기 말 현재 2892만원 꼴로 연내 3000만원을 돌파하리라는 전망마저 나온다. 가계 빚이 국내 소비와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금융 위험을 높인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다만 금융 당국은 지난 10년 새 국내 경제·금융 상황의 ‘상수’로 자리 잡은 가계 부채를 향한 과도한 우려를 경계하는 편이다. 부채 총량이 많긴 하지만 빚 증가세가 둔화하고 있고 질적 측면에서도 양호하다는 이유에서다.
예컨대 국내 전체 가계 부채 중 소득 상위 30%인 고소득자 대출 비중은 64.1%, 신용등급 1~3등급인 고신용자 대출 비중은 69.7%에 달한다.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의 고정금리 및 분할 상환 대출 비중도 2014년 말 23.6%, 26.5%에서 작년 말 현재 44.5%, 49.8%까지 늘어난 상태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미국, 영국, 아일랜드 등 선진국은 금융위기 당시 저소득층의 가계 대출 부실이 문제가 되며 부채 감축과 경기 부양 등을 위해 정부가 돈을 푼 것”이라며 “반면 한국은 외국 자본 유출로 일부 환율이 오르는 등의 일이 있었지만 LTV, DTI 등을 통해 비교적 가계 부채를 잘 관리했고 현재도 양호하게 관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미국 기준금리 인상 여파로 가시화하는 국내 시장 금리 상승이 빚 많은 가계와 내수 소비 등에 미칠 악영향을 줄이려면 뒤늦게나마 정부 재정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문이 적지 않다.
한국은행 등도 국내 가계 부채 문제의 ‘약한 고리’로 빚 상환 능력이 떨어지는 취약 차주를 거듭 거론한다. 취약 차주 대출액은 올해 2분기 말 현재 85조1000억원으로 작년 말보다 2조4000억원 증가했다. 취약 차주는 전체 가계 대출자의 7.9%인 149만9000명에 달하며 이들의 대출액이 전체 가계 대출의 6%를 차지한다. 특히 취약 차주 대출은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은 비은행권에 65.5%가 쏠린 실정이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그간 경기 부양은 물론이고 취약 계층 지원이나 사회 안전망 강화 등을 위한 재정 지출 확대에 전반적으로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국내 가계 빚 증가에 정부 역할이 컸던 만큼 부작용 완화에도 그만큼 노력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