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th SRE]수요 부진 ‘늪’에 빠진 정유

by경계영 기자
2014.11.10 10:40:00

[산업]유가 하락에 신성장동력도 요원

[이데일리 경계영 기자] “기간산업이라고 후한 점수를 퍼주던 시대는 지났다”

크레디트 업계가 단호해졌다. 정유업은 국가가 전략적으로 관리하는 에너지산업인 데다 사업 안정성이 높고 과점 구조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그러나 계속되는 적자에 재무지표가 악화하면서 더 이상 정유사에 ‘AA’급의 높은 신용등급이 적정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유업에 대한 시장의 시각 변화는 20회 SRE에서도 나타났다. 응답자 139명 가운데 82명(59.0%)이 최근 6개월 안에 업황이 악화한 산업으로 정유업을 꼽았다.

정유업은 지난 19회 SRE에서 업황이 악화한 산업 5위로 처음 순위에 등장한 데 이어 20회 SRE에서는 단숨에 1위의 불명예를 안았다.

국제유가가 심상치 않다. 지난 10월 북해산 브렌트유는 4년 만에 최저치인 배럴당 83달러선으로, 서부텍사스유(WTI) 또한 2012년 이후 최저치인 80달러선으로 추락했다.

석유개발기구(OPEC) 회원국이 석유를 증산하고 있고 미국 또한 석유 생산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제재 조치에 어려움을 겪는 러시아까지 재정 확충을 위해 석유 공급을 늘렸다.

유가 하락세가 멈출 줄 모르는 상황에서 정유사는 난감한 처지가 됐다. 평균 1000만~2000만배럴의 재고를 확보하고 있어 유가 하락에 따라 재고평가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재료 투입에 시차가 있어 유가와 함께 정제마진도 줄어든다.

정유업체의 공급도 늘고 있다. 지난해 휘발유와 경유 합산 생산량이 10년 전보다 50% 늘어난 반면 석유제품 생산량은 13% 느는 데 그쳤다.

국내 정유사는 국내에서의 성장이 한계에 부닥친 가운데 해외로 눈을 돌렸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중국, 중동 등이 역내 증설에 나선 탓이다.

특히 주요 수출 대상인 중국은 휘발유, 경유 등의 부문에서 3년 만에 순수출국가로 돌아섰다. 이는 곧 기존 정유사의 가동률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국내 정유사 가동률은 2010년 82.7%에서 2011년 84.1%, 2012년 85.2%로 상승했지만 지난해에는 81.7%로 급락했다.

가장 큰 문제는 늘어난 공급을 받아줄 수요가 없다는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10월 세계 석유 수요 전망을 하루 70만배럴로 종전 대비 22% 하향 조정했다. 주요 원인은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 하향이 지목됐다. 또한 유가가 배럴당 80달러를 밑돌아도 원유생산국가가 이윤을 취할 수 있어 공급을 줄일 가능성도 크지 않다는 게 IEA의 진단이다.

유가가 하락하는 데다 세계 경기 회복 지연으로 수요가 부진해 지난해부터 올해에 이르기까지 원유가격과 국제 석유제품가격의 차이를 의미하는 정제마진 역시 회복이 늦어지고 있다.

국내 정유사는 본업인 정유사업에서 부진을 만회하고자 비정유부문 투자를 늘렸다. 정제과정에서 나오는 중질납사를 이용해 방향족 제품을 만드는 석유화학부문과 고도화설비과정의 부산물인 미전환잔사유(UCO)로 윤활유부문에 진출했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 국내 정유사 합산 영업손실은 1204억원에 이르렀다. 믿었던 비정유부문이 ‘폭탄’이 됐다. 윤활유부문은 지난해 1분기를 바닥으로 안정적인 실적 회복세를 나타낸 반면 석유화학부문에서 수익률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지난 5년 평균 8%를 웃돌던 석유화학부문의 수익률은 올해 상반기 2%대로 뚝 떨어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정유부문의 부진을 상쇄하던 석유화학부문에서 파라자일렌(PX) 시황이 부진했던 점이 정유사 실적을 끌어내렸다.

PX는 국내외 정유사가 앞다퉈 투자에 나선 가운데 중국의 경제 성장률이 7%대로 둔화하고 중국 정부 차원에서 추진했던 고순도테레프탈산(PTA) 증설계획이 지지부진해 공급 과잉 상태에 다다랐다.

PX 가격은 지난해 톤당 1404.5달러였지만 올해 상반기 중 1100달러선까지 하락해 201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비정유부문의 완충 역할이 쪼그라들었는데도 S-Oil은 석유화학부문 투자를 발표하며 시장 우려를 키우고 있다. 석유공사 온산 부지를 5000억원에 매입하고 잔사유 분해시설과 올레핀계열에 투자할 예정이다. 투자예정금액만 8조여원으로 6월 말 총자산 12조1442억원의 66%에 이른다.

한 SRE 자문위원은 “기본적으로 각 정유사가 설비 투자를 늘린 가운데 부진한 석유화학부문에 투자한다는 것이 걱정된다”며 “전기차 등 에너지산업의 방향이 석유화학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갈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자 신용평가사도 정유사에 대한 등급 강등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SRE 자문위원은 “신평사가 정유업에 대해 언급할 때 그동안 말미에 ‘언제쯤 좋아질 것’이라고 했지만 이제 긍정적 전망 대신 ‘등급을 유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로 태도가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실제 한국기업평가는 9월 ‘크레디트 세미나’에서 “업황 부진이 지속되면서 정유사가 실적을 개선할 가능성이 제한적”이라며 “연간 실적을 가늠할 수 있을 때 신용등급 적정성을 판단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입장 표명에 항상 조심스럽던 신평사마저 대표적 기간산업의 신용등급 적정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최근 신용등급 체계(hierarchy)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점도 정유사엔 부담이 되고 있다.

한기평이 상반기 포스코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내린 이후 고평가됐던 기업의 신용등급도 함께 조정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유사 가운데 SK이노베이션(096770), GS칼텍스, S-OIL(010950) 등이 ‘AA+’등급으로 포스코와 같은 신용등급이다. 그러나 크레디트 업계는 이들과 포스코의 재무지표 수준 차이를 이유로 정유사들이 등급 하향 조정 대상이 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다른 SRE 자문위원은 “올해와 같은 실적이 내년까지 이어진다면 ‘AA’급에 붕어빵으로 붙어 있는 정유사 신용등급이 내려가야 할 것”이라며 “국내에서 1위로 꼽히는 포스코가 ‘AA’급으로 강등된 것 자체가 조그만 시장을 과점하는 정유사에 악재”라고 봤다.

단순히 유가가 반등세를 보인다고 해서 정유사의 실적 부진이 해결되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 크레디트 연구원은 “유가가 회복하더라도 원유 증산, 각 정유사 설비 증설 등으로 공급이 과잉인 상태에서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정유사가 업황 개선에 힘입어 실적을 개선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기사는 이데일리가 제작한 ‘20th SRE’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20th SRE는 2014년 11월11일자로 발간됐습니다. 책자가 필요하신 분은 문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의 : 02-3772-0161, bond@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