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진의 Tour & Culture)금융만 가지고는 안 된다

by정장진 기자
2008.11.24 15:38:18

[이데일리 정장진 칼럼니스트]요즈음은 주식도 없고 펀드도 없는 사람이 술을 산다고 한다. 하지만 농담을 하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금융위기”, “집값 붕괴”, “실직 공포”, “감산”, “구조조정” 등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헤드라인을 가득 채우고 있다. 거의 매일 듣다 보니 이제는 거의 무덤덤해져 간다.
 
잔뜩 겁에 질린 우리를 또 한 번 겁먹게 하는 것은, 요즈음 언론을 보면 어지간히 공부를 하지 않으면 도통 뭔 소리인지 알아 들기 힘든 전문 용어가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모기지 정도는 이젠 퀴즈 대회 같은 데도 나올 정도로 많이 알려졌지만, 파생상품을 비롯한 그 이외의 전문 용어들과 영어 약자들은 감조차 잘 잡히질 않는다.

▲ 뉴욕 월스트리트
▲ 뉴욕 증권거래소
겁나고 잔뜩 주눅이 들어있긴 해도, 얼마 전 영국 여왕 폐하께서 하신 것처럼, 본질적인 질문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엘리자베스 2세는 최근 한 공식석상에서 "왜 아무도 금융위기를 몰랐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토록 파장이 크고 파산과 자살이라는 단어가 일상용어가 된 이 엄청난 파국에 이르기까지 “왜 아무도 몰랐나요?” 징조도 있었을 것이고, 소문도 있었을 텐데, "왜 아무도 금융위기를 몰랐나요?"

먹고 사는데 전혀 걱정이 없는 여왕이지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왕 자신도 금융위기의 와중에서 앉은 자리에서 무려 2천500만 파운드의 재산 손실을 봤기 때문이다. 런던 정경대의 신관 건물 개관식에 참석한 여왕은 최근 신용 경색 위기의 원인과 영향에 대해 루이스 가리카노 교수로부터 브리핑을 받은 후 이 질문을 던진 것인데,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아니었나 싶다.

"왜 아무도 금융위기를 몰랐나요?" 그 수많은 경제학 교수들과 MBA 강사진, 노벨상을 수상한 전문가들, 애널리스트, 재경부 장관과 경제 대통령을 포함한 관료들은 "왜 모두들 금융위기를 몰랐나요?"

저주를 퍼부을 의도는 없지만, 그러나 금융위기를 보면서 “쩐으로 흥한 자, 쩐으로 망한다”는 말이 입 안에서 뱅뱅 맴돈다. 감이 잘 안 잡히는 먼 나라 이야기나, 수십, 수백 억 달러 이야기가 아니다. 다복회라는 이상한 공동체 이름도 떠오르고, 수십 억을 바카라 도박에 날렸다는 유명 MC 이름도 스쳐 지나간다.
 
공기업 이사의 침대 밑에서 다발로 나왔다는 상품권 뭉치도 눈 앞에 떠오르고, 한 편으론 “합격의 기쁨으로 하루 종일 울다가, 그 다음 날은 등록금 걱정하느라 또 하루 종일 울었다는 한 대학 합격생이야기도 들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터부시하거나 금융을 사기와 동의어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잘은 모르지만 돈으로 돈을 생산하는 과정이 금융일 것이고, 아무리 복잡해도 모든 금융은 금융의 기본 줄기인 “돈으로 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금융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앞의 돈과 뒤의 돈이 얼마나 다른 성격의 돈이지는 대충 알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고리 대금이나 사채 이자를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돈으로 돈을 생산하고 그 돈으로 다시 또 돈을 생산하고 하는 식이다. 어음, 할인, 채권, 주식, 증권, 예탁증서, 양도성, 파생상품, 펀드…….

이 순환 논리가 계속되다 보면 갈수록 인간은 사라질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익명성으로 존재하는 메커니즘만 남는다. 그래서 여왕이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질문을 했을 때 누구도 시원하게 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어디가 끝인지 어디가 시작인지,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소리는 나는데 이 놈의 장치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지, 어디서 힘을 얻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만 망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모두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다 망했다.



비유가 적절한 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보면 금융 시스템 속에 사는 현대인과 기업과 정부는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기계 군단과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컴퓨팅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존 코너는 기계와의 힘든 싸움을 벌이는데, 이 싸움은 두 개의 시공간에서 벌어진다. 하나는 미래에서 벌어지는 전투이고 다른 하나는 그 미래에서 보면 과거인 현재에서 벌어진다. 영화는 이 현재의 싸움을 보여준다.

만화 같은 SF 영화지만, 이 <터미네이터>가 우리에게 주는 흥미로운 교훈은 결국 인간은 기계와 싸우게 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기계는 인조인간인 안드로이드와 빅브라더에 해당하는 중앙 통제장치의 형태로 나오지만, 이는 하나의 비유로서 금융 시스템 같은 익명의 메커니즘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형상기억합금에 나노 기술까지 접목된 첨단 안드로이드는 도저히 죽일 수 없는 존재다. 이 안드로이드는 미래에서 현재로 날아와 미래에 태어날 구원자인 존 코너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그의 어머니 되는 사라 코너를 죽이려고 한다.
 
어딘지 성경에 나오는 성령으로 잉태한 성모의 수태고지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이 스토리 설정은, 그러나 시스템과의 싸움이 종국에는 미래를 확보하는 전쟁이라는 또 다른 교훈을 준다. 여기서 미래는 그 역시 전쟁 판인데,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싸움에서 인간이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 구원자가 살아남을 것 아닌가. 잘 만든 SF는 보기에 따라 여러 각도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SF 물을 금융위기와 비교하자면, <에일리언>을 들 수 있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여신인 누트Nut를 그린 스위스 화가 기거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이 시리즈는,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 자라는 괴물 이야기이다.
 
여기서 괴물은 인간 내부에 있다는 교훈이 그로테스크한 형상과 에피소드들을 통해 전달된다. 즉 돈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갈증이 에일리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끈적한 타액을 흘리며 접근하는 그 끔찍한 모습이 돈에 굶주린 인간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



금융은 돈이 돈을 생산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인간과 금융과의 싸움은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안드로이드와의 싸움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오장육부 깊숙한 곳에 붙어 자라나는 돈을 숭배하는 에일리언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대안은 없다. 싸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싸우는 방법들 중 하나가 문화와 예술이다. 여기서 문화와 예술은 좁은 의미의 문화와 예술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유인촌 장관이 수장으로 있는 문화체육관광부라는 부처 이름 속에 들어있는 문화도 아니고 예술인총연합회라는 단체 이름에 들어있는 예술도 아니다.

금융도 예술이며 경제 행위도 문화다. 인간의 사고와 활동 중에 문화와 예술이 아닌 것은 거의 없다. 따라서 금융이 예술이 되고 경제 행위가 문화가 되려면 금융과 경제 행위가 인간 삶의 전체가 아닌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철저할 정도로 요구된다.
 
익명의 장치로서의 시스템이나 메커니즘에서 익명성을 줄여나가야 할 것이고 문화와 예술의 힘은 거대 자본의 파괴력을 예측하고 경고하는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와 예술의 이 측면을 인간적인 측면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여기서 인간적인 측면이란 자본주의 시스템을 보장하는 한도 내에서 자본의 윤리성을 보장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의 시스템을 통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사회주의 시스템을 빌려올 수도 있다. 공교육개념, 토지공개념, 환경공개념 같은 것은 자본주의가 가질 수 없는 사회주의의 독특한 매력들 중 하나다. 또한 글로벌화된 환경에서 G20같은 모임이 만나서 밥이나 먹는 자리가 아니라 훨씬 구체적이고 집행효율성을 지닌 기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와 예술은 이 전체적인 흐름이 인간을 위한 것이 되도록 감시하고 비판하는 고유의 기능을 갖고 있다. 시스템 내부에도 문화와 예술이 있어야 한다. 시스템이 시스템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금융이 금융 자체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안티 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시스템 구축하기도 힘든데, 안티까지? 그러나 자정 능력을 상실한 시스템은 안드로이드가 되어 지구를 멸망시키려고 찾아올 것이다. 우리 내부의 에일리언도 빨치산처럼 그 침공에 합세하기 위해 우리의 몸을 뚫고 기어나올 것이다.



홍콩 사람들의 자존심을 자극한 이 말은 2008년 봄, 한 영국 외교관이 홍콩을 떠나며 한 말이다. 홍콩의 금융산업은 세계적이지만 문화 소프트웨어가 없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말인데, 이 영국 외교관은 홍콩 영화를 높게 평가하지 않은 셈이고 또 중국에 환수된 홍콩의 미래도 비관적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국인들의 지독한 배금주의를 비꼬는 말이었다.
▲ 홍콩의 금융중심지인 센트럴 지역
어쨌든 홍콩에 ‘현금’이 풍부한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홍콩섬의 중심지인 센트럴 역에서 좌우로 뻗은 5백 여 미터의 퀸즈 로드Queen's Road는 가장 많은 돈이 몰리는 금융 중심지다.
 
200여 개의 다국적 금융회사들과 세계 100대 은행 중 74개가 이곳에 진출해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HSBC, JP모건, 골드만 삭스, 도이치 방크, ABN 암로 등 전 세계 최고 금융기업의 간판들이 마치 장식처럼 내걸려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결제은행(BIS), 국제상업회의소(ICC) 등 국제금융기구 아시아 지역본부들도 모두 퀸즈 로드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몇 개월 가지 않아 영국 외교관은 얼굴을 붉히며 쥐구멍이라도 찾게 생겼다. 런던은 지금 여왕도 한 마디 하실 정도로 혹독한 위기의 중심에 서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사람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 홍콩 스카이라인

사실 홍콩에 가보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크게 볼 것이 없다. 비행기 타고 가서 쇼핑이나 하고 딤섬이나 좀 먹고 말 그대로 바람이나 좀 쏘이다 오는 것이 고작이다. 이것이 매력이라면 매력이랄 수도 있다. 홍콩 교외에 있는 거대한 좌불이나 멋진 현대건축이 볼거리들 중 하나다.

기념물이나 명소만 문화와 예술이 아니다.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꾸며 놓은 곳은 명소 축에 들지도 못한다. 먼저 내국인들이 편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그리고 내국인들이 편하고 즐겁게 사는 모습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 된다. 홍콩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는 모습 그대로가 영국 외교관이 보기에 한심하게 보였던 것이리라.

왜 홍콩은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리고 홍콩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던 런던과 뉴욕은 또 왜 오늘날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되었을까? 서울이 홍콩 혹은 홍콩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던 런던, 뉴욕이 되지 않으면서도 세 도시의 장점만 갖춘 도시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정말 불가능한 일이고, 요원한 일일까? 금융위기 속에서 깊이 고민해 볼 문제일 것이다.
 
한국의 석학들이, 문화 예술인들이 나서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이제 경제 대통령만 믿고 있어서는 안 될 시점에 한국이 와있는 지도 모른다. 한국은 어쩌면 위기에 대한 경제학적, 철학적 진단과 함께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내야 하는 시점에 와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