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하정민 기자
2006.05.18 13:44:22
[뉴욕=이데일리 하정민특파원] 이민자의 나라 미국이 때아닌 주인 논란으로 들썩이고 있다. 이민법 개정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불법이민자 근절을 위해 주 방위군 투입이란 초강수까지 제시하자 사회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불법 이민 규제 강화를 추구하는 공화당 내에서도 규제 대상과 방법, 그 강도에 대한 여러 의견이 난립하고 있고 민주당은 적절한 대응책 마련도 못하는 양상이다. 보수층은 부시의 정책도 지나치게 온건하다고 아우성이고, 지난달 대규모 시위를 시발로 한 이민자들의 집단 대응도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바야흐로 이민 문제가 미국의 국가적 난제로 등장한 것이다.
뉴욕은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이민자들이 존재하는 이민자들의 도시다. 그런 뉴욕에서도 사람들의 의견은 백이면 백 다 다르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법을 어겼으니 당장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강경론, 지금까지 들어온 불법 체류자는 어쩔 수 없지만 단속을 강화하고 불법 이민자들에게도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 중도론, 미국의 건국 정신에 위배된다는 옹호론까지 다양하다.
기자가 최근에 만난 올해 72세의 필리스 샤프 할머니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그녀는 이른바 바이블 벨트(Bible Belt)에 속하는 캔자스 출신의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WASP)다.
바이블 벨트란 기독교 원리주의 신도가 많이 거주해 보수성이 강한 미국 남부지역을 일컫는 말로, 부시 대통령의 고향이 텍사스도 대표적인 바이블 벨트 지역에 속한다.
성악을 전공하고 젊은 시절 브로드웨이에서 가수로 활동한 바 있는 샤프 할머니는 은퇴 후 여생을 교회 내 봉사 활동에 바치고 있다. 그녀는 "부시는 전형적인 텍사스 인(Bush is a typical Texan)"이라며 그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텍사스인의 가치관에 입각해서 이뤄지고 있다고 강한 비판을 가했다. 이어 "텍사스 사람들은 옛날부터 히스패닉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며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민간인 학살을 비롯해 텍사스 방위군들이 저지른 만행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샤프 할머니는 방위군 투입을 비롯한 일련의 강경책들이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는 부시가 오는 중간 선거와 다가오는 대선을 위해 내놓은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효과가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불행하게도 의심의 여지없이 효과가 있다"며 "언제나 그랬다"고 답한다. 그녀는 "그것이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모두 부시가 이긴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특히 방위군 투입과 같은 강경책으로 이민자들을 억제하려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또 "군대 이동은 국경 지역에서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나 하는 일"이라며 "국경 지역의 상황은 어제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데 왜 군대를 투입하느냐"고 말했다.
샤프 할머니는 존 스타인벡의 대표작 `분노의 포도`의 주인공 조드 일가를 거론하며 불법 이민자들이 현대판 조드 일가라고 동정심을 표했다. 이어 "현실적으로도 120명도 아니고 1200만명이나 되는 불법 이민자들을 무슨 수로 쫓아내겠느냐"며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이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가 보기에 불법 이민자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주장은 크게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주변의 미국인들도 이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는 것 같지는 않다. 대다수가 히스패닉인 불법 이민자들이 대개 미국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허드렛일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속지주의를 택하고 있는 미국에서 태어난 불법 이민자의 자녀들이 세금을 내는 미국인들의 의료 및 교육 혜택을 나눠 가진다는 점이다. 불법 이민자에 대해 동정심을 표시하는 미국인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이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샤프 할머니조차 이 점을 지적했다.
샤프 할머니는 "부시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지만 민주당 역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에 대안을 내놓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어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며 아무도 해법을 내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이민법을 둘러싼 미국 사회의 혼란과 리더십 부재의 현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며 "상상하기도 싫지만 동구권 독립 후 쪼개진 많은 나라들처럼 미국도 분열될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평생을 무탈하게 보낸 중산층 미국 노인조차 이런 속내를 비치는 것은 이민법이 현재 미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임을 증명한다. 그만큼 해결하기도 힘들고, 어떤 방법을 도출한다 해도 이해 관계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의 반증인 셈이다. 미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최근 이 문제로 홍역을 치른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는 물론이고, 한국도 자유롭지 않다.
흔히 로마 제국의 성공 원인을 로마의 개방성에서 찾는다. 실력있는 이방인을 로마시민으로 차별없이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정책에서 로마의 힘이 나왔다고 보는 의견이다. 과거의 미국 이민 정책도 로마와 비슷했고 큰 성공을 거뒀다. 이민자들과 미국이 택한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미국으로 몰려와 일궈놓은 결과와 업적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이에 대한 그들의 애착심, 애국심, 충성도는 토박이 미국인을 능가하는 경우도 많다.
현재 이민법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미국의 근간을 이뤘던 이 원리가 향후에도 제대로 작동할까란 의문이 든다. 사실 미국에서 남부는 경제적으로 가장 뒤떨어져 있고 사회제도도 낙후된 곳이다. 그러나 다원주의를 극도로 배척하는 텍사스식 가치관은 부시 집권 이후 미국 사회에서 빠르게 그 힘을 넓혀가고 있다. 케케묵은 남부의 가치관이 미국 사회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미국은 물론 세계의 번영이 위협받고 있다면 지나친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