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진한 향기, 날 힘들게 해
by조선일보 기자
2008.02.27 14:22:09
''향기 피로감'' 호소하는 이 늘어 미국 등에선 ''향기 없는 영역'' 등장
향수 매출 줄고 ''비누 향'' 등 인기
[조선일보 제공] 회사원 이숙현(32)씨는 얼마 전 지하철로 퇴근을 하다 좌석을 포기하고 옆 칸으로 옮겨 갔다.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성의 향수 냄새가 너무 진해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가기 전 들른 헬스클럽에선 '딸기 향 공격'을 받았다. 벽에 부착된 스프레이 방향제는 약 10분마다 자동으로 향기를 뿜어대 꽉 막힌 공간을 달짝지근한 향으로 채웠다.
향수, 로션, 세제 등의 인공 향에서 비롯된 '향기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무향(無香)의 달콤함(The Sweet Smell of…Nothing)'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백화점 곳곳에 피워 놓은 향초, 강한 과일 향이 나는 세제 등 너무 많은 향에 노출된 데 따른 향기 피로감(fragrance fatigue)이 확산되는 듯하다"고 했다. 공공장소에서의 향수가 남에게 영향을 끼치는 만큼 휴대폰 통화나 흡연과 비슷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캐나다에선 '금연 구역', '통화 금지' 구역과 비슷한 개념의 '향기 없는 영역'이 늘어나는 추세다. 캐나다 핼리팩스시는 일터 및 학교에서의 향수 사용을 자제토록 한 권고안('No-Scent' awareness program)을 시행 중이다. 방향제 및 향수 성분에 알레르기가 있는 이들을 배려해 향이 들어간 향수, 로션, 헤어스프레이 등을 되도록 쓰지 않도록 한 것이다. 지난해 4월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재활협회 연례 회의, 지난해 10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도서관 사서 회의 '액세스(Access)' 등은 참가 신청을 하는 이들에게 '향수 사용은 금한다'고 미리 고지했다. 시애틀에 있는 블레스드 새크러먼트(Blessed Sacrament) 성당은 일요일 오전 미사 때 '향기 없는 구역'을 지정했다.
'가장 무난한 선물'로 인기를 누리던 향수 매출 역시 주춤하는 분위기다. 미국 마케팅 연구 기관 '인포메이션 리소시즈(Information Resources)'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대형 마트 및 약국형 편의점의 향수 매출은 3억4000만달러(약 3218억원)로 2004년 3억4600만달러(약 3274억원)에 비해 감소했다. 또 다른 시장 연구 기관인 'NPD 그룹'이 조사한 결과 미국 백화점에서 판매된 향수 종류는 2002년 756종에서 지난해 1160종으로 크게 늘었지만, 같은 기간 매출은 20억달러(약 1조8930억원)에서 19억7000만달러(약 1조8646억원)로 떨어졌다. 이 회사가 980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향수를 쓰지 않는다'는 여성은 2003년 13%에서 지난해 15%로 증가했다.
한국의 경우 롯데백화점의 향수 매출은 2005년과 2006년 각각 20%, 3% 정도 떨어졌다가 지난해 10% 정도 늘었다. 롯데백화점 유수근 MD는 "올해(1월 1일~2월 21일)의 경우 향수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약 15% 늘었으나, 화장품 전체 매출 증가세(약 19%)에 비하면 낮은 편"이라고 했다.
'인공 향'에 질린 이들이 늘자 아기 냄새나 비누 향 등이 나는 '향수 같지 않은 향수'의 주가가 올라가고 있다. 메이크업 브랜드 바비 브라운에서 2월부터 석 달 동안 봄 한정상품으로 판매하려고 내놓은 '베쓰(Bath·목욕)'는 '샤워 마치고 나왔을 때의 향이 난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보름 만에 매진됐다. 전통적으로 향수에 들어갔던 강한 꽃 향기 대신 백단(白檀), 네롤리(neroli), 파출리(patchouli) 등 나무나 허브에서 추출한 재료를 많이 넣었다. 장식 없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이 향수는 '관능미'를 내세우는 대신 '편안함'에 초점을 맞춰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했다.
아기용 파우더 향이 나는 불가리 '쁘띠 에 마망(Petits et Mamans·아기와 엄마)'은 아기 향수라는 '제목'을 달고 출시했지만 젊은 여성들이 대거 구입했다. 이 향수를 즐겨 사용한다는 대학생 조수정(20)씨는 "아기에게 사용해도 될 정도로 순한 재료를 썼다고 해서 샀는데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뿌릴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LG생활건강 센베리 퍼퓸하우스 김병현 부문장은 "수많은 아이스크림이 나와도 베스트셀러는 언제나 바닐라 향 아이스크림인 것처럼 사람들은 후각과 미각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으려는 성향을 보인다"고 했다.
1. 식사 약속이 있는 날 꼭 향수를 써야겠다면 상대방의 '입맛'을 배려해 무릎이나 발목 안쪽 등 하반신에만 향수를 뿌리자. 식탁 위로 향이 과다하게 퍼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2. 향수에는 꽃, 허브, 사향 등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성분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공연장, 병원, 회의실같이 막힌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와 함께할 가능성이 있는 날은 향수를 쓰지 않는 게 안전하다.
3. 코는 향기에 쉽게 피로해져 약 한 시간이 지나면 향을 잘 느끼지 못한다. '향이 다 날아갔네'라는 생각에 향수를 반복해서 뿌리다 보면 상대방에 불쾌감을 줄 정도로 과다한 향을 풍길 가능성이 있다. 향수는 하루 한 번이면 충분하다.
4. 약 1m 밖에서도 향을 적나라하게 맡을 수 있다면 사용량이 과하다는 뜻이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향이 너무 진하지 않은지 확인하자. 실수로 너무 많이 뿌렸다면 색조화장 클렌저를 화장솜에 적셔 메이크업을 지운다는 느낌으로 닦아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