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시장 재편, 18년째 `공회전`…韓 글로벌 최후진국 전락

by윤종성 기자
2022.06.06 17:39:32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답을 찾다] 전력시장①
美· 유럽에 이어 日· 中· 동남아도 전력시장 개방
시장원리 거스른 독점 체제…한전은 '만성 적자'
탄소중립 달성하려면 판매시장이라도 개방해야

[이데일리 윤종성 김형욱 기자] 우리 전력시장은 한국전력(015760)에서 형식적으로 독립한 발전 자회사들이 시장을 나눠 먹고, 나머지 도매·수송·소매부문까지 한전이 독점하고 있는 기형적 형태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산업구조개편기본계획이 민영화 논란 등에 가로막혀 반쪽 짜리가 되면서 탄생한 전 세계 유일의 돌연변이 시장이다.

한국전력공사 전남 나주 본사 (사진=한전)


한전 독점체제로 운영되는 우리 전력산업은 1990년대 일찌감치 전력시장 경쟁체제 도입을 시작한 영국, 미국 등은 물론이고 2010년대 뒤늦게 개편에 나선 일본과 비교해도 한참 뒤처져 있단 평가다. 심지어 동남아, 중남미, 아프리카 국가보다도 못해 한전이 사상 최대 적자를 내는데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6일 대한전기협회와 전력업계 등에 따르면 한국수력원자력과 남동·중부·서부·남부·동서발전 등 한전 6개 발전 자회사가 국내 발전량의 약 71%를 담당하고 있다. 나머지 30% 가량의 전기는 SK E&S, GS EPS, 포스코에너지 등 민간발전사가 생산한다. 하지만 한전은 발전사들이 생산한 전력을 100% 구입하고(도매), 송·배전망을 활용해 전력을 중개하며(수송), 최종 소비자에게 전력을 판매(소매)하는 역할까지 도맡아 전력산업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작업이 미완으로 끝난 뒤 18년째 이어지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산업 구조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한전의 발전부문을 6개 자회사로 쪼갠 뒤 2단계로 배전을 분할하고 3단계로 판매 자유화하는 등 10년에 걸쳐 전력시장을 경쟁체제로 전환하는 내용의 전력산업구조개편 기본계획을 추진했다.

외환위기 직후 한전의 외채규모가 나라 전체 외채의 약 10%에 달하는 등 재정 부담이 컸기 때문으로, 당시 미국·유럽 등에서 유행한 신자유주의 바람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2001년 발전부문은 한전에서 분리했지만,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배전부문 분할 작업이 노조 반발로 중단되면서 전력산업 구조개편 논의는 멈춰 섰다. 이후 한전 1개사가 전력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는 체제를 지속하고 있다.

전력시장의 특성상 대부분 국가 전력시장이 과점 형태를 띠지만, 우리나라처럼 정부 통제 아래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전력시장 구조를 가진 나라는 없다. 2021년 전기연감을 보면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지역의 경우 도매시장 48%, 소매시장 29%가 민간 영역에서 거래된다. 유럽연합(EU)도 1996년부터 본격적인 경쟁체제 도입을 시작해 2020년까지 도매시장 93%, 소매시장 85%를 경쟁 체제로 전환했다.



[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영국은 1990년 칠레(1978년)에 이어 두 번째로 시장 개방에 나서 1998년 전체 시장의 100%를 경쟁 체제로 전환했다. 그나마 우리와 가장 흡사하게 중앙 집권적 성격을 보였던 프랑스도 프랑스전력공사(EDF)의 발전 및 판매부문 비중을 70~74% 수준으로 낮췄고, 송·배전도 자회사 형태로 각각 분리해 최소한의 망 중립성을 확보했다.

우리는 전력시장 선진도만 보면 중국이나 중남미·아프리카 등지와 비교해도 낮다는 평가다. 중국은 2002년 국가전력공사에서 5개 발전사와 2개 송전기업을 분리한 후 꾸준히 개방에 나서 시장거래 비중을 50%까지 높였다. 태국, 말레이시아 등 발전부문은 국영기업과 민간이 시장을 양분하고 소비자의 직거래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브라질, 멕시코 등 중남미 나라들은 발전과 송·배전부문을 분리한 데 이어, 판매부문에서도 일부 자유계약을 허용했다.

시장 원리를 거스른 전력 시장의 독점 체제는 한전의 만성 적자 배경이자, 한국 전력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로 여겨진다. 형식적인 자회사 분할로 인해 발전사 간 가격 경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데다, 적정 이윤 보장 없는 정부의 전력가격 통제로 한전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려면 최소한 판매시장만이라도 개방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는 석탄비중이 압도적인 한전이 전력시장을 독점하다 보니 탈탄소 시대로 진행하기 어려운 구조”라면서 “정부도 한전을 통해 전기요금을 통제하고 있어 신재생에너지 판매자들의 시장진입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우리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7.5%에 그쳐, 영국(40.9%)과 독일(40.6%), 미국(12.9%), 일본(12.5%), 프랑스(11.5%) 등에 크게 못 미쳤다.

앞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한국 에너지정책 국가보고서’에서 우리 에너지 전환의 최대 걸림돌로 ‘비효율적인 전력시장’을 꼽기도 했다. 보고서는 “한국 전력부문은 단일 구매자로 구성되고, 도소매 가격은 시장이 아닌 정부가 설정한다”며 효과적 에너지 전환을 위해 한국은 한전이 독점한 전력시장을 민간에 개방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연제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연구팀장은 “205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선 결국 전력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면서 “지금 당장 개방하지 않더라도, 이를 준비하기 위한 논의는 시작할 때가 됐다”고 언급했다. 전영환 홍익대 전기공학부 교수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전력시장에서 독점 구조를 취한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라며 “우리와 여건이 비슷한 상황에서 판매 시장을 개방했던 일본의 사례를 적극 참조해 판매시장 개방을 추진해야 한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