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소현의 일상탈출)⑪마음이 아려오다

by권소현 기자
2006.09.29 15:52:26

[이데일리 권소현기자] 콜카타(캘커타), 시인 타고르가 '동방의 등불'을 읊조렸던 곳이며 라비 상카르가 전통악기 시타르를 튕겼던 곳, 또 힌두교의 성자 라마크리슈나와 그의 수제자 스와미 비베카난다가 가르침을 행했던 곳.

예술적으로, 종교적으로 콜카타는 위대한 도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마더 테레사가 빈민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칠 수 있을 만큼 인도에서 가장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도시다.

그래서 콜카타를 가지 않으려 했다. 지금까지 봐온 인도도 힘들고 슬펐는데 콜카타에 가면 정말 우울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일정이 꼬였다. 네팔 카투만두에서 인도 바라나시행 교통편이 해결 안되는 바람에 콜카타행 비행기를 탄 것이다. 단 하루만 자고 다음날 기차로 곧장 바라나시로 가면 된다고 위로했다.

콜카타 공항에 내리자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확 밀려왔다. '다시 인도구나'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며 공항을 빠져나왔다. 콜카타의 상징인 노란 택시들이 줄을 서서 손님을 기다린다. 바가지 쓸 염려가 없는 프리페이드(prepaid) 택시 부스에 가서 미리 돈을 치루고 전표를 받아 택시에 탔다.


▲ 콜카타의 상징인 노란 택시
도저히 시동도 안 걸릴 것 같았던 택시는 툴툴 거리면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택시가 내뿜은 뿌연 매연에 시야가 흐릿하다.

까만 피부의 운전사는 무표정하게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다. 배낭여행자들의 거리인 셔더스트릿으로 가자고 했다. 형식적으로 어느 나라에서 왔냐, 인도에는 얼마나 있을 거냐 등등을 묻던 운전사는 뜬금없이 짐의 무게가 총 얼마냐고 물었다.

결국 짐에 대한 비용을 따로 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앞에 워밍업으로 형식적인 질문들을 했던 것이다. 분명 추가 비용이 없는 프리페이드 택시를 탔는데 무슨 소리냐고 발끈했다.

25kg을 초과하면 1kg당 1루피씩 더 내야한다고 열심히 설명하는데 모르쇠 작전으로 나갔다. 아예 대꾸도 하지 않자 '헬로 마담?'하고 몇번 부르더니 포기했나보다. 조용해진다.

우리 모두 차창밖만을 주시하며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고 택시 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렇게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의아해졌다. 왜 콜카타를 빈민의 도시라고 했을까. 델리만큼 복잡했지만 적어도 공항에서 셔더스트릿까지 40분의 여정에서 느낀 콜카타는 깨끗하고 정돈된 도시였기 때문이다.

콜카타에 짐을 풀고 하루밤을 지내면서 당초 이틀간의 일정을 나흘로 늘렸다. 왠지 깔끔한 콜카타가 좋았다.


▲ 영국 식민지 시대의 건물인 라이터스(Writer's) 빌딩

영국 식민지 시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여기가 유럽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했고 시내 중심의 '메이단'이라고 불리는 넓은 잔디밭은 눈을 시원하게 해줬다.

후글리 강변으로 나가면 시원한 강바람을 쐴 수 있었고 거리에는 걸인보다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인도인이 더 많았다.

델리보다 훨씬 일찍 지하철이 개통됐고 거리에는 오토릭샤보다 택시가 더 많았다. 트램과 인력거까지 뒤섞여 거리는 무법천지였지만 가고자 하는 곳을 가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빈곤의 도시' 보다는 '현대적인 도시'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렇게 콜카타를 휘젓고 다니던 어느날 길을 잃었다. 뒷골목으로 들어선듯 싶었는데 길 양쪽에 쓰레기가 한 더미다.

쓰레기 더미 사이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개이거나, 고양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더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등이 굽은 할아버지였다. 음식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아 들고는 마치 대어라도 낚은 듯 흐뭇해하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쾡한 눈과 마주친 순간, 그 자리에서 발을 뗄수가 없었다. 나의 놀란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음식 찌그러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황급히 걸음을 재촉해 골목을 빠져나왔다. 사실 뭔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피하고 싶었다. 저 노인이 다가와 구걸하며 만지기라도 하면 피부병에 걸릴 것만 같은 비겁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쓰레기 더미를 맴도는 파리와 그 속에 완전 동화된 듯한 노인의 비쩍 마른 몸은 한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 노인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 게 두고 두고 후회됐다.

인도에서 거지를 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보통의 거지들은 '적선함으로써 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는 철학에 떳떳하게 구걸한다. 그러나 눈물샘을 자극할 정도로 안타까운 경우도 종종 있다.

콜카타에서 본 그 노인이 그랬고 뭄바이에서 본 장애인들도 마음 한켠을 아리게 했다.

뭄바이의 해변에 있는 이슬람교의 성자 하지알리 무덤을 가는 길이었다. 아라비아해 해안에서 50m정도의 좁은 시멘트길로 연결된 하지알리의 무덤은 밀물때에는 섬이 됐다가 썰물때에는 육지가 된다.

그날 비가 왔고 파도도 높았다. 아라비아해에는 온갖 쓰레기와 검은 기름이 둥둥 떠있었고 파도가 한번 칠때마다 검은 구정물이 높이 치솟았다 떨어졌다.

▲ 아라비아해를 건너 하지알리의 무덤으로 가는 길

우산도 없이 구정물 물벼락을 피하기 위해 멈췄다가 뛰었다가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나아가던 나는 좁은 길 중간에 딱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양팔이 잘린 사람, 그리고 양 다리가 잘린 사람, 팔다리가 하나씩 없는 사람, 이렇게 세 명이 길 한가운데 누워서 그나마 남은 팔과 다리를 흔들면서 구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와 파도에 흠뻑 젖어 앙상한 몸은 그대로 드러났다. 관광객과 순례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은 처절했다.

머리 속이 텅빈 느낌이었다. 그러나 얍삽한 나의 이성은 그렇게 멍하게 서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대로 있다가는 물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득 들면서 그들을 피해 뛰기 시작했다. 이미 몇번 아라비아해의 파도에 맞아 인도에서 산 하얀 옷에는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들어있었다.

이번에도 그들을 도와주지 못했다. 마음은 아픈데 머리속에서는 가방에서 지갑을 찾아서 돈을 꺼내 그들에게 건네주는 시간이면 나도 같이 물에 빠쥔 생쥐꼴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거리에서 노숙자를 볼 때마다, 거지들이 구걸을 하러 다가올 때마다 나는 이들을 떠올렸다. 인도는 늘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시끌벅적하면서도 활기찬 나라였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나라기도 했다.


 


▲ 콜카타의 후글리 강, 한 가족이 바람을 쐬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