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이진우 기자
2002.05.27 14:49:01
[이진우 칼럼니스트] 미국이 “IMF 외환위기”를 맞았나요? 추락하는 달러의 바닥이 어디가 될지 궁금합니다. 보통 시장이 안 움직일 때 무척 답답해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막상 “큰 장”이 서면 서너명의 승자(勝者) 탄생을 위해 예닐곱명의 피눈물 나는 패자(敗者)가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지금 시장은 환율의 급락을 당연시하면서(?) 얼마 전 1330원대에서 환율이 놀 때 수출업체들이 조치를 취할 만큼 취해 놓았다, 이 정도의 환율급락은 이미 예견되던 일이다 라는 식의 전지전능한(?) 분석과 시황들도 눈에 띄는데, 달러/원 환율의 1230원대 지지여부도 불투명한 상황에 이르러 불과 한달 보름 전 우리가 관심을 두고 지켜보던 레벨들을 다시 떠올려보면 씁쓸한 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달 보름 뒤의 환율을 지금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
◇시인(詩人)이 말하고자 한 바는 환율이 아니겠지만…
지나고 보면 - 김기린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 것을
왜 그렇게 다투었던가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찌 그렇게도 물고 늘어졌던가
지나고 보니
우스운 것을
왜 그렇게 보이려 했던가
지나고 보니
미안한 것을
어찌 그렇게 고집스러웠던가
어차피
지금은 지나 버리고 마는 것
내일 싸우고
내일 보이는 게
참 싸움
참 보임인 것을.
환율전망을 묻는 필자에게 한 후배가 시(詩)를 보내왔다. 40원도 무너질까, 작년 2월 21일에 찍고 돌아섰던 저점인 1232.90원이 타겟일까, 얼마 못 가 1200원도 무너질까…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을 가지고 전전긍긍하는 필자에게 이 시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접하게 되는 “지나고 보면 우습고 미안하고 별 것 아닌 것”을 시인은 얘기하고 있지만 필자는 135엔의 공방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던 무렵의 우리 외환시장과 그 주변들을 떠올리면서 이 시에 많이 공감하고 깨닫는 바 또한 많다.
◇지금은 환율이 오를 것이라고 얘기하면 정신 나간 사람이 돼
“미 달러화가 본격적인 하락추세에 접어들었다. 경기회복세가 불투명하고 앞으로도 미국 자본시장에 투입되었던 국제자금의 유출이 가속화 될 것이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미국의 경기회복세가 일본이나 유로존을 능가한다고 전망했으며 일본은 이른바 “3월 위기설”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출 증가율의 뚜렷한 회복세에서 향후 서울 외환시장의 달러공급우위 장세가 예상되며 환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할 수 밖에 없다.”… 원래 환율이 급등하는 시기에는 수출업체는 찾아보기 어렵고 온통 정유사니 뭐니 해서 수입할 회사들 밖에 안 보이다가 환율 빠지는 시기에는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임을 새삼 깨닫기 마련이다.
“증시가 지금은 조정국면을 거치고 있지만 다시 외국인들이 매수세를 재개하면 종합주가지수 1000 포인트를 훌쩍 넘는 2차 랠리가 시작될 것이고 환율 또한 추가급락의 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 하루 오르면 하루 빠지는 주식시장은 요즘 지수 850을 향해 수렴해 가고 있다. 무슨 계기로 인해서이건 조만간 장이 다시 출렁거리겠지만 1000을 향해 갈지 700을 향해 내려설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양호하다는 사실이 환율에 반영되고 있으며 세계 주요통화들이 동반 강세를 띄는 가운데에 이루어지는 원화절상은 수출업체들에게도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1330원대에서 환율이 형성될 당시에도 이미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수출업체들은 과거 원화환율과 엔/원 환율이 800~900원 하던 시절에도 수출 잘 하며 기업을 키워 나왔다.
결국 작금의 환율 급락세는 사후 약방문식으로 갖다 붙이는 위의 제반이유로 도 설명할 수 있지만 그 동안 “쓸데 없이” 높게 형성되어 거래되던 미 달러화가 세계 각국에서 거품이 빠지며 제 위치를 찾아가고 있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단순하지만 정확한 분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 동안 틈만 나면 ”강한 달러 선호”를 외치던 미국 행정부가 달러가치의 급락을 방치하고 있다.(이럴 때 한 마디라도 거들어 준다면 일본이나 서울의 외환당국이 이토록 힘든 싸움은 치르지 않을 터인데, 저렇게 강 건너 불 구경하는듯한 미국의 태도를 보라.)
상황이 이럴진대 “달러/엔 환율 상승”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달 만에 1262원에서 1334원까지도 치솟을 수 있었던 환율이 지금처럼 빠지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거기에다 지금은 수급이나 펀더멘털상의 재료들도 환율하락에 우호적인 상황에서야… 달러는 지금 부도 직전의 회사가 발행한 어음이나 다를 바 없는 입장에 처했다. 무슨 시한폭탄을 들고 있기라도 한 듯이 환율이 몇 원이라도 반등하려고 하면 대기매물이 쏟아져 나오고 투기적 세력들은 당국의 구두개입을 고점매도의 기회로 여기기까지 한다. 시장은 아직 구두개입이 통할 만큼 그렇게 숏이 깊지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인터뱅크 플레이어들의 롱플레이가 물량부담에 못 이겨 손절매로 이어지면서 환율의 낙폭을 키우는 장세가 펼쳐지고 있다.
1300원 위에서 좁게는 15원 넓게는 30원 정도의 박스권을 유지하며 너무 오랜 기간 달러/엔에 집착하며 환율이 고공비행을 한 여파가 너무 크다. 만약 지금의 달러 급락장이 미국이 원하는 방향이고 국제금융시장을 선도하는 큰 손들의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른 장세라면 그 여파는 이제부터의 시작이 본 게임이 될 수도 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이 확정되는 날 1216원을 가고 8강 진출까지 이루어내면 1180원도 갈 수 있다는 전망같지 않은 전망도 농담 삼아 주고받는 판국에 향후 환율에 대한 정치한 분석이나 전망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한 달 전을 생각하면 지금 너무 허망하듯이(혹자는 뿌듯하듯이) 한 달 후에도 우리는 환율로 인해 허망해질(뿌듯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왜 그럴까? 자고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