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여고 골목길에 들어서니 ‘친절한 금자씨’가 반기네
by조선일보 기자
2006.10.12 12:22:00
[조선일보 제공] 설마, 부산에서 영화만 볼 생각은 아니겠죠?
부산은 극장 밖도 극장입니다. 곳곳이 영화의 한 장면이죠. 부산에서의 영화촬영을 지원하는 부산영상위원회 김정현 홍보팀장은 “99년 12월 부산 영상위 설립 이후 지금까지 150편 넘는 작품을 부산에서 찍었다”면서 “두말 할 것 없이 전국 으뜸”이라고 자랑합니다. 영화도시 부산, 잊을 수 없는 영화 속 그 장소 7곳을 따라잡았습니다. 영화보다 멋진 영화 속 부산 7선.
KTX로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해운대 달맞이고개로 달음박질했습니다. 청사포 기찻길을 보려구요. 어른이 된 수호(차태현)가 수평선과 나란히 달리는 철로를 따라 걷다 수은(송혜교)의 목소리에 돌아보던 바로 그 곳. ‘파랑주의보’가 엄청난 관객의 사랑을 받은 영화는 아니었지만, 이 철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철로의 하나입니다. 전국에 단 두 곳밖에 없는 해변 철로이기 때문이죠. 부산진역에서 포항까지의 동해남부선 중에 해운대역~송정역 사이의 7㎞ 구간. 오른쪽은 동해, 왼쪽은 해운대 해송(海松)을 껴안고 달리는 길입니다. 무궁화호와 통근열차 합쳐도 하루에 10번 정도밖에 달리지 않는 길. 이 구간 무궁화호 요금이 2800원이니, 시간표(www.korail.com) 확인하고 꼭 한 번 타 볼 일입니다. 마침 영화제 열리는 해운대에서 걸어서 30분이면 충분합니다. 지하철 2호선 중동역에서 달맞이 고개 쪽으로 10분 정도 걸어오면 만날 수 있습니다. 로얄킹덤호텔과 해월정 사이, ‘바다가 보이는 색소폰 라이브하우스’ 건물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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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은 영화 스틸. 가운데는 부산 그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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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기차의 낭만에 취해 언덕을 내려오다 달맞이 고개의 갤러리 몽마르트르를 만납니다. 기억하시죠? 실제 연인이 영화에서도 연인으로 나와 곱절의 화제를 만들었던 지난 4월의 멜로 ‘도마뱀’. 죽음을 앞둔 아리(강혜정)가 자신의 사진전시회에서 마지막으로 조강(조승우)을 만나던 바로 그 갤러리. 아리만큼이나 예쁜 큐레이터 박성희씨가 “마침 전시일정 때문에 영화제 기간에는 하루도 쉬지 않는다”고 환하게 반겨줍니다.달맞이 고개에는 10여 개의 화랑이 모여 있답니다. 아기자기한 골목길, 더구나 밤에는 둥실 떠오른 달이 아름다운 산책롭니다. 이곳에서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면 백년가약을 맺는다는 곳이죠. 청사포 철길과는 걸어서 3분. 미포 6거리에서 시작했다면 달맞이길을 찾아 걸어 올라가세요. 5분이면 간판이 보일 겁니다. (051)746-4202
역시 영화만큼이나 스케일이 크더군요. 블록버스터 ‘태풍’을 찍었던 곳. 해운대 그랜드 호텔에서 시작한 씬(장동건)과 세종(이정재)의 추격이 불을 뿜으며 이어졌던 바로 그 장소죠. 눈이 부실만큼 멋진 요트들이 넓은 바다를 하얗게 물들입니다. 긴 머리 휘날리며 요트에 몸을 싣고 도망치는 영화 속 장동건의 초조함과는 달리, 수백 척 요트가 정박해 있는 지금 이 곳은 너무나 고요합니다. 12일 부산영화제 개막식도 이 곳에서 열리죠. 개막작 ‘가을로’의 야외 상영이 예정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구요. 마침 초대형 스크린과 무대 공사가 한창이더군요. 부산영화제의 영어이니셜 ‘PIFF’를 새긴 색색 깃발이 태평양의 바람에 휘날립니다. 부산의 명물 광안대교의 웅장함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구요. 휴일이면 부산시민들은 이 곳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하루를 즐긴답니다. 어때요, 당신도 한 번? 지하철 2호선 시립미술관역에서 바다쪽으로 도보 10분.
반가웠어요. 물고기 그림이 걸려 있던 자리가 선반으로 바뀐 것만 빼면 하나도 바뀌지 않았더군요. 그래요. 15년간 갇혀 있다 풀려난 오대수(최민식)가 주먹보다 큰 산낙지를 입에 집어넣고 의식을 잃었던 그 일식집, 고젠입니다. 횟집 요리사 미도(강혜정)와 운명의 만남을 갖던 집이기도 하죠. 일식집 고풍스런 현관 앞에는 영화 속 그 장면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습니다. 내친 김에 혹시 산낙지 메뉴가 있는 지 물었습니다. 사람 좋게 생긴 박남용 조리이사가 껄껄 웃더군요. 코스요리 서비스 음식으로 잘게 잘라 내놓기는 하지만, 어디 그렇게 커다란 놈을 통째로 손님께 드리겠냐구요. 고젠(御鮮)은 “황제의 밥상”이란 뜻. 가격이 만만치 않은 고급 일식집입니다. 점심특선 스시세트가 1만5000원, 저녁의 코스요리는 4만원부터 시작합니다.지하철 1호선 명륜동 역에서 금강공원 쪽으로 걸어서 10분. 언덕길입니다. (051)553-9771
당황했습니다. ‘원초적 정사 2’와 ‘원초적 정사 3’이 동시상영중이더군요. 그 극장이잖아요. 800만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며 전국에 부산사투리를 전염시켰던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 고등학생이던 유오성 장동건 서태화 정운택이 단체관람하러 갔다가 패싸움을 벌이던 바로 그 극장. 삼일극장은 에로영화 전문 동시상영관으로 바뀐 지 오래였습니다. 극장 입구 한 쪽 의자에 앉아있던 할아버지는 “30년 전만 해도 최고였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계단에서 막 굴러 떨어지고 그랬어”라고 하시는군요.
순간, 피곤에 지친 얼굴의 30대 남성이 혼자서 표를 끊어 들어갑니다. 극장 간판에는 안소영 주연의 ‘애마부인’과 로버트 데니로의 ‘디어 헌터’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언제 상영했는지 모를, 그 옛날 손으로 그렸던 영화 간판, 바로 그 그림이죠. ‘친구’의 흥행 이후 부산시는 이 곳 삼일극장부터 범일동 구름다리까지를 ‘친구의 거리’로 명명하고 2001년 5월 현판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삼일극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올해까지라는군요. 도로 확장 때문에 곧 철거될 운명이랍니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건배. 참고로 한 집 걸러 삼성극장에서는 ‘산딸기 5’와 ‘그녀의 붉은 곳’이 동시상영중이었습니다. 1호선 좌천동 역에서 현대백화점 쪽으로 걸어서 5분.
아찔했습니다. 주례여고 정문 앞에서 아래를 굽어보니 경사가 장난이 아니더군요. 1970년대와 2000년대가 공존하는 ‘동시패션’의 도시 부산에서도 가장 최전선에 있는 곳. 학교 앞의 ‘아이비 서점’에서는 책만 파는 게 아니었습니다. 여자스타킹부터 넥타이, 그리고 일회용 카메라까지. 그 옆 전신주에 붙은 ‘방 2, 매매가 3000만원’(전세가 아닙니다)라는 벽보가 눈에 띕니다. 금자씨(이영애)는 그 전신주 옆을 지나 눈 덮인 밤길을 걸어갔었죠. 빵집 소년이 부르는 ‘빨간 구두 아가씨’ 노래에 맞춰. 마지막엔 두부케?에 얼굴을 묻으면서. 골목길 한 쪽에 있는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었습니다. 다시 굽어보니 부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동서고가도로와 백양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군요. 새로 지은 초고층 아파트들까지. 하지만 이곳은 모든 것이 멈춘 듯, 고요합니다. 그 정적이 마음에 들었다면 실례일까요. 2호선 냉정역에서 5번 마을버스를 타고 주례여고 앞에서 내리세요. 꼭 타세요. 걷기에는 땀이 꽤 흐를 겁니다.
솔직히 처음엔 시시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그렇게 높고 길어 보이더니, 나지막하더라구요. 바바리코트 깃을 올려 세운 장성민(안성기)이 오르락내리락 계단을 누비며 살인을 저지르던 중앙동 40계단. 하지만 점점 이 계단에 정이 갑니다. 40계단에는 사연이 있더군요. 한국전쟁 시절, 이 계단을 사이에 두고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갈렸답니다. 위쪽은 피난민들의 판자촌, 아래쪽은 관청과 시장이 들어서 있던 동네로 말이죠. 또 서로를 잃어버릴까 걱정하던 피난민들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던 계단이기도 하답니다.
2004년에는 아예 중구청이 이곳을 ‘테마거리’로 지정, 문화의 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계단 중앙과 거리 곳곳에는 조각상도 들어서 있더군요. 아 참,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는 사실 하나. 40계단을 마주 선 자세에서 고개를 오른 쪽으로 돌려보세요. 20m 앞에 ‘중앙 간판’이 보일 겁니다. 그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 폭이 1m밖에 안 되는 40계단이 숨어있습니다. 사실, 원래 40계단은 이곳이라더군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계단 폭이 좁아졌고, 10여년 전 중구청에서 지금 자리로 옮겼답니다. 1호선 중앙동 역에서 걸어서 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