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애플은 혁신기업이 아니다

by김정남 기자
2012.09.10 13:30:13

애플탓 부품기업 공멸..애플, 구매에서는 '혁신' 요원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국내 굴지 전자부품업체의 한 임원은 ‘애플’ 얘기만 나오면 몸서리를 친다. “애플 기사를 제발 좀 쓰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이유를 물으니 “아이폰이 잘 나간 덕에 부품기업 실적이 좋아졌다는 기사가 나가면 애플 본사에서 연락이 온다. ‘잘 나간다니까 가격 더 깎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은 협상이 아니라 통보에 가깝다고 했다.

지난 7월 말 SK하이닉스(000660) 기업설명회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한 증권사 연구원이 “애플의 수요 예측이 엇나가는 탓에 생긴 부품 재고를 소진하느라 너무 낮은 가격으로 팔리는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SK하이닉스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권오철 사장은 “다 알면서도, 멀리 보고 공급하고 있다”며 말끝을 흐렸다.

사사키 노리오 도시바 사장은 몇 달 전 애플 아이폰4S에 대한 낸드플래시 공급계약을 두고 크게 화를 냈다. 애플의 잘못된 수요 예측 탓에 악성재고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전력’이 전공인 노리오 사장은 “반도체 사업 제대로 하라”고 일갈했다. 도시바는 결국 감산을 결정했다.

부품기업을 쥐어짜는 애플의 행태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최대 고객’ 애플이 두려운 나머지 부품업계가 쉬쉬했던 것뿐이다. 업계 1위든 2위든 예외는 없다.



이에 반기를 든 곳이 바로 삼성전자(005930)다. 애플의 잘못된 수요 예측이 몇 차례 계속되면서부터다. 삼성전자가 생산한 애플 맞춤 부품은 고스란히 악성재고로 쌓였다. 재고를 등에 업고 가격 인하를 은근히 주장하는 애플의 압박은 삼성전자에게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

실제로 삼성전자 LCD사업부(현 삼성디스플레이)는 아이폰4S부터 LCD를 공급하지 않았다. 아이폰5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메모리사업부도 올 들어 범용 낸드플래시를 공급하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차라리 모든 부품 계약을 끊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삼성전자와 애플의 부품 신경전은 스마트폰 특허전의 영향이 다소 있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완제품 이슈에 휘둘릴 정도로 삼성전자 부품사업이 간단치는 않다. 대표이사도 ‘부품통’ 권오현 부회장이다. 삼성전자는 애플의 과도한 가격 압박에 반기를 든 첫 번째 기업일 뿐인 것이다. 제2, 제3의 삼성전자가 나타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애플은 이견이 없는 ‘혁신’의 대명사다. 혁신(革新)은 글자 그대로 가죽을 벗겨내면서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이다. 스마트폰 시대를 연 애플은 분명 혁신기업이다. 하지만 구매에 있어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부품기업과의 협력에서도 세상을 놀라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부분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애플은 진정한 혁신기업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