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김세형 기자
2009.08.18 14:14:20
3김의 한 축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대한민국 민주주의 풍미한 3김
지역주의는 청산과제..서거로 청산 관심
[이데일리 김세형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우리나라 정치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3김` 시대도 `물리적 종언`을 맞게 됐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정착에 이들이 기여한 것에 대해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지만 이들은 `지역 할거주의`라는 고질적인 병폐도 양산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을 계기로 이들은 모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3김 시대는 공식적으로 마감했다. 하지만 이들이 남겨 놓은 지역주의가 여전히 한국 정치판에 어슬렁거리고 있다.
호남권의 맹주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정치권에 `지역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문화가 형성될 지 관심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1924년생), 김영삼 전 대통령(1927년생),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1926년생)를 한묶음으로 일컫는 `3김`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통상 지난 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직후로 볼 수 있다. 그전까지 이들이 정치 일면에 없었던 것은 아니나 박정희 대통령의 피격당하면서 이들이 권력의 최상층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늘상 야권의 대표주자들이었다. 이승만 정권 붕괴와 5·16 군사 쿠데타로 약화된 해방 이후의 정치권을 대체하는 신세대의 기수들이었다.
둘은 박정희 정권에 맞서 그들의 경력을 쌓아갔고, 야권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서로 맞붙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심해질 때 핍박을 받았던 것 역시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살해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박정희 정권 말기에 국회의원직에서 영구제명되기도 했다.
이에 비해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군사 쿠데타에 가담해 정치권에 등장한 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것을 필두로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두 차례 지냈을 정도로 실력자였다. 그러나 항상 2인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총격에 의해 사망하면서 대한민국은 정권에 공백이 생겼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다. 이같은 공백기에 부상한 것이 이들 3김이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권의 대표주자로서, 김종필 전 총재는 전 정권의 지분 보유자격이 감안됐다. 작고한 종교계 지도자 강원용 목사의 중재 아래 이들 3김의 권력 분점이 막바지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권리를 주장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사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
이때 3김이 권력 분점에 합의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대가 좀 더 빨리 왔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는 게 사실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이들 3김은 정계 은퇴와 가택연금 등 정권의 탄압을 받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다만 이때는 지역주의 색채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87년 정권 막바지에 이른 전두환 정권은 장기집권을 시도하고 국민들은 피로 얼룩진 6월 항쟁으로 결국 직선제 개헌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 내게 된다. 이는 3김 시대가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됐다.
정치 활동 금지가 풀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손을 잡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정권 창출에 나섰고, 김종필 전 총재도 미국에서 귀국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뒤 정계에 복귀했다. 이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후계자격인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와 그해말 대통령 선거에서 대결하게 된다.
이때 대통령 당선에 가장 앞서 있던 것은 통일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때 평화민주당을 창당, 대통령 선거에 나섰는 데 이것이 결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호남,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남, 그리고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충청도 등 지역 할거주의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각자 후보마다 100만명 넘는 지지파를 동원해 여의도에서 유세를 가진 것은 지역 할거주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은 했지만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은 매우 강렬했다.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민정당은 국정 안정을 위해 야권에 손을 내밀게 된다. 이것은 3당 야합으로 일컫어지는 1990년의 민정당, 통민당, 신민주공화당의 전격 합당으로 귀결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표라는 직함을 얻었고, 김종필 전 총재는 내각제라는 꿈을 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안정적 국정운영이라는 소득을 얻었다. 이때부터 분할과 야합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얻었다. 서로 각기의 지역 기반을 갖고, 정권 획득에 전력하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권 경쟁에서 승리한 김영삼 후보가 민자당 후보로 나온다. 영남과 충청권을 등에 업은 김영삼 후보는 호남을 기반으로 재차 출마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의 꿈을 이루게 된다. 김대중 후보가 선거 패배 여파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런던으로 갔지만 3김 시대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김종필 전 총재는 정권 창출에 기여한 공으로 김영삼 정부 초기 집권 민주자유당의 대표가 됐지만 결국 불화를 참지 못하고 1995년 2월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독자정당을 다시 창당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를 전후해 정계에 복귀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여권과 김대중, 김종필의 야권이라는 3각 분할구도가 이뤄진다. 이때가 3김의 절정이랄 수도 있다.
97년 대선에서는 재차 합종연횡이 이뤄진다. 3당 합당시 야합이라고 극렬 비난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측과 김종필 전 자민련측이 일명 DJP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후보로 내세운 것. 때마침 불어닥친 IMF 경제위기라는 시대 상황도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네번의 도전끝에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3김도 한풀 꺾였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3년 퇴임하고 2004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국회의원 선거 참패를 이유로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3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영남권 출신의 호남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고, 스스로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을 제안하면서 3김 시대 종식에 앞장 서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시절 3김이 완전히 끝난 줄 판단했지만 3김의 지역주의 유산은 2007년 대선에서 고스란히 되살아 났다. 영남권을 기반으로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막판까지 접전을 벌이는가 하면 정계밖에 있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후보가 충청권을 등에 업고 재차 정계에 들어 왔다.
집권 여당도 마찬가지였던 터라, 열린우리당은 전주 출신의 정동영 의원을 후보로 내세우면서 여전히 지역주의의 한계를 표출했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한 지 1년반으로 접어 들고 있지만 이런 지역주의는 여전한 모습이다. 지역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인물에, 그 인물이 현직에 있건 이선으로 후퇴해 있건 정치인들이 줄을 대는 양상이다. 이명박 대통령마저도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지역 갈등을 척결대상으로 꼽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사실상 막을 내렸던 3김 시대는 이제 물리적으로도 종언을 맡게 됐다. 하지만 가장 손쉽게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남이가`로 대표되는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는 이상, 지역주의 척결까지는 아직 멀기만 해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90년 3당 합당을 계기로 완전히 등을 돌린 뒤 최근까지도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직전 병상을 직접 찾아 화해를 모색했다. 이 둘의 화해가 양편으로 갈라섰던 대한민국의 갈등을 봉합하는 계기가 될 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