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없었다면 내 詩도 없었다

by오현주 기자
2011.07.22 15:09:25

고은, 아내에게 쓴 118편
53년 만에 첫 사랑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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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
고은|292쪽|창비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수십년 전 그날로/ 오늘도 나는 감히 사랑의 떨려오는 처음입니다/ 다리미질 못한 옷 입고/ 벌써 이만큼이나 섣불리 나선/ S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사랑은 사랑의 부족입니다`).

“천 권의 해석/ 천 권의 설명을 떠나는 것처럼 떠난다/ … / 나는 아내에게 푸른 하늘의 편지를 쓴다/ 무식하게/ 그리움이 외로움이라고/ 외로움이 그리움이라고 쓴다”(`편지`).

이제 곧 여든 살. 일흔여덟의 노시인이 사랑의 시를 썼다. 53년 문학인생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절절한 사랑고백을 한 상대는 그의 아내다. 시집은 시인 고은이 28년을 같이 산 아내 이상화 중앙대 영문과 교수에게 바치는 시 118편을 묶은 것이다.

시집에선 30년 시인 부부의 세월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인다. 일상에서 피어오른 생각들을 보이고(`아내의 퇴근` `임신`), 하루하루 얻어낸 소박한 행복감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다(`저녁 요구르트` `계산`).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생긴 아쉬움이 큰 만큼(`국제전화` `다시 국제전화`), 아내를 세상에서 떠나보낼 날의 형상이 가슴 아프다(`무덤`).

곳곳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회고가 자리한다. 특히 1983년 5월5일 결혼식 풍경에 대한 묘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유리/ 안병무네 집 마당/ … / 주례 함석헌/ 축시 문익환/ 축사 이문영 백낙청”(`수유리`), “초례 마치고/ 한강가에서/ 하룻밤 자고/ 안성 대림동산으로 왔다/ 축의금 봉투를 꺼내보았다/ 이백만원 얼마”(`자전거`).



노벨문학상 후보로 해마다 거론되는 시인이 사랑에 웃고 우는 모습은 익숙지 않다. 독자의 불편함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노시인은 사랑고백을 꽤나 즐기는 듯하다. 과연 처음인가 싶다. 50년 시인의 관록이라 보기도 어렵다. 범부의 순수함이 더 크게 보이는 탓이다.

▲ 국내 최대 연작시 `만인보`를 통해 시공의 한계를 초월한 인간사를 읊었던 시인 고은이 범부로 돌아가, 사랑은 `하였다`도 아니고 `하리라`도 아닌 바로 지금이라며 아내 앞에 연시집을 바쳤다(사진=창비).

`이성에 의한 플라톤의 유토피아를 사절한다.` 서문에 밝힌 시집에 대한 변명이다. 어떤 원인으로 아내를 만나고 자신이 그에 의해 존재를 드러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 아내 상화와 함께한 세월을 반추는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시집은 그 결과물이다.

`상화와 함께`라는 표현조차 `상화 속에서`라는 표현의 부족이라고 토로했다. 그래서 “그토록 지난 세월은 상화 속의 세월이다.” 시인에게 정신적 삶을 만들어준 아내가 없었다면? 그는 두 가지가 불가능했을 거라고 했다. 지금껏 살아있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고, 1983년 이후 문학의 결실을 얻어낼 수도 없었을 거란다.

올해 5월5일 부부의 결혼기념일에 아내 상화가 시인에게 내주었다는 시 두 편 중 한 편을 시집의 첫머리에 세웠다. “어느 별에서 왔느냐고/ 불쑥 묻지 말아요/ … / 이 행성의 한 점에서/ 내가 당신에게로 갈 때/ 이 행성의 한 점에서/ 당신은 내게로 온 것이에요”(이상화, `어느 별에 왔을까`). 행성에서 시작됐을 지난한 그 사랑이 비로소 온전히 시인 부부의 것이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