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이서 스토리] 팀 코리아 익스프레스 황진우 - ‘쉬지 않고 달려온 선택과 도전의 시간’
by김학수 기자
2016.11.02 10:13:11
[이데일리 오토in 김학수 기자] 팀 코리아 익스프레스의 감독 겸 선수인 황진우는 국내의 그 어떤 드라이버보다 다양한 레이스에 출전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커리어는 카트를 시작해 투어링카는 물론 일본의 슈퍼GT와 F1 머신으로 각 국가의 선수들이 자웅을 겨루는 A1 그랑프리를 거쳐 국내 모터스포츠의 정상 무대인 스톡카 레이스에 이르고 있다.
성적으로 팀을 이끄는 선수가 아닌, 레이스 외적인 부분에서도 팀을 이끌어야 하는 감독으로서 첫 시즌을 겪은 황진우 감독을 CJ대한통운 슈퍼레이스 최종전 현장에서 만나 정신 없이 달려온 카레이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과연 그의 시간 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녹아 있을까?
황진우 감독에게 레이스의 시작을 물어보니 “1997년 안양천에 있던 작은 카트장에서 ‘렌탈 카트’로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자동차를 좋아했던 만큼 어린 마음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모습을 본 아버지(황운기/현 오토시티 레이싱팀 단장)께서 길을 열어 주셨다”고 말했다.
카트에 재미를 느낀 황진우는 1998년부터 카트 레이스에 나섰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경기장을 다녔지만 직접 레이스카(카트)를 몰았던 적이 없던 만큼, 첫 카트의 기억은 무척 즐거웠다”고 말하고는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카트를 타기 시작하고, 공식 대회가 출범한 1999년부터 본격적인 카트 레이스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1998년 당시에는 카트라는 문화가 있었으나 제대로 된 리그나 팀, 대회 운영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황진우 감독 역시 “당시에는 발보린 카트 클럽과 같이 ‘카트 클럽’ 단위에서 진행되는 대회를 통해 경기에 대한 감각을 쌓고 1999년 본격적인 데뷔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황진우와 같이 출전하던 선수는 조훈현, 정연일, 정의철 등으로 현재까지 국내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활약하는 이들이다.
황진우의 레이스 첫 시즌은 ‘우승’으로 장식했다. 1999년 시즌 챔피언에 오른 황진우는 2000년에도 좋은 페이스를 이어가며 시즌 챔피언을 바라보는 듯 했다. 하지만 황진우에 대한 기대는 조금 더 빨랐는지, 황진우는 2000 시즌을 마무리 하기도 전에 포뮬러 카테고리인 F1800에 오르게 됐다.
황진우 감독의 포뮬러 데뷔는 엉망이었다. 황 감독은 “당시 포뮬러 무대에 호기롭게 데뷔는 했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고, 특별한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라며 “인디고, 오일뱅크, 이레인 등 쟁쟁한 팀, 선수들 사이에서 뒤쳐졌다”며 웃음을 지었다. 당시 황진우 감독은 “다른 선수들에게 피해만 주지 말자는 생각으로 달렸고, 결국 큰 성과는 내지 못한 시즌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레이스 커리어에서 첫 번째 시행착오를 겪은 황진우 감독은 잠시 스티어링 휠을 내려 놓았다. 레이스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길었던 공백이었다. 그 시간 동안 황진우 감독은 어학 연수 및 견문을 쌓으며 잠시 자기개발과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무대에 올랐다. 황진우 감독은 “잠깐의 공백을 겪은 후 첫 복귀한 대회가 아시안 포뮬러 르노였고, 시즌 중간에 출전해 종합 2위에 올랐다”며 웃었다.
황진우 감독은 “특별히 준비한 무기가 있거나 특별한 훈련 메뉴가 있던 건 아니었다”라며 “흔히 말하는 젊은 선수들이 가진 패기와 무모함 등을 앞세워 달리면서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 같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황진우 감독의 아시안 포뮬러 르노의 호성적은 많은 사람들이 황진우를 집중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 때문일까? 황진우 감독은 2002년 창원 F3 무대에 한국 대표로 출전했다. F3에 대한 경험도 없고 국내 팀들 역시 F3 수준의 에어로 다이내믹이나 매커니즘에 대한 지식도 얕았던 만큼 황진우 감독의 성적은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진우 감독에게는 ‘큰 무대’를 경험하게 된 첫 순간이었다.
게다가 당시 창원 F3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은 말 그대로 대단했다. 당시 황진우 감독과 함께 그리드에 섰던 선수들은 니코 로즈버그, 루이스 해밀턴, 젠슨 버튼 등 현재 F1 무대에서도 기라성 같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게다가 황진우 감독은 “참고로 아시안 포뮬러 르노 시절에는 카무이 코바야시와도 함께 달렸다”라며 웃음을 지었다.
한국을 대표해 F3 무대에 나섰지만 황진우 감독의 포뮬러 레이스 커리어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진우 감독은 “포뮬러를 타고 싶었고, 더 발전하고 싶었지만 현실이라는 벽을 마주하게 됐다”라며 “국내에서는 F3가 개최될 수 없는 상황이었고, 해외에 나가 F3에 나서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다”며 아쉬움을 이야기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황진우는 국내 박스카 레이스에 데뷔에 나선다. 2003년 당시 렉서스 킥스 레이싱팀의 김정수 단장이 GT1 클래스의 시트를 황진우에게 제안한 것이다. 레이스카를 준비하는 시간이 부족했고, 박스카 레이스에 대한 이해도도 낮았지만 황진우 감독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레이스에 나섰다.
당시 경기를 회상하던 황진우 감독은 “준비 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시퀀셜 쉬프팅 방향이 반대로 되어 경기 내내 쉬프트 레버를 반대로 조작하며 달렸던 기억도 있다”며 웃었다. 황진우 감독은 개막전에서는 5위에 그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후 포디엄 피니시 및 우승을 더하면서 종합 3위로 박스카 레이스 데뷔시즌을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성공적인 데뷔로 보이겠지만 황진우 감독은 “박스카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던 만큼 GT1 차량의 움직임이 마치 ‘배’ 같았다”라며 “움직임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타이어 관리에 대한 부분에서도 미숙해 청킹이나 파스 같은 트러블도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행착오는 ‘포뮬러 무대에서 박스카 레이스에 등장한 젊은 드라이버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이듬해 황진우 감독은 시즌 챔피언에 오른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2005년하반기부터 2007년 상반기까지 국내 모터스포츠의 역사로 남을 11경기 연속 폴포지션이라는 대업을 달성하며 ‘황진우’라는 이름을 국내 모터스포츠 관계자 모두에게 알리게 된다.
이런 영광은 많은 견제를 낳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 정상급 기량을 뽐내던 선수들은 새로운 신예의 포디엄 피니시, 우승 그리고 시즌 챔피언을 막기 위해 매 코너마다 전력으로 승부했다. 황진우 감독은 “지금도 함께 달리는 선배들 중에 당시에 경쟁했던 선배들도 많은데 그 당시 정말 전투와 같은 치열한 경쟁을 했던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특히 인디고와의 경쟁은 ‘처절할 정도’였다. 많은 지지층과 팬들이 있는 인디고 레이싱팀과 맞서야 했던 황진우 감독은 “많은 팬들과 명확한 경쟁 구조 덕분에 당시 시즌의 흐름이나 경쟁에 대한 관심이 무척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라며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미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라며 웃었다.
항진우 감독은 “김정수 단장님과 함께 4년을 보냈을 즈음 김정수 단장님이 팀을 떠나라”라는 말을 했다”라며 “보통 선수들이 먼저 다른 팀으로 나가는 등, 선수들이 먼저 나가는데 김정수 단장님이 먼저 떠날 수 있게 등을 밀어줬다”라며 슈퍼GT 출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진우 감독은 “당시 팀의 렉서스 GT1 레이스카 관련으로 기술적인 직원을 해주던 KTR 팀이 슈퍼GT GT300 클래스에 출전하고 있어 슈퍼GT 출전에 대한 제안을 했고 또 한국타이어에서도 KTR팀에 후원을 하고, 또 슈퍼GT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라며 “이런 상황을 알고 계시던 김정수 단장님이 팀에 미안한 마음 가지지 않고 떠날 수 있게 보내주셨다”고 웃음을 지었다.
황진우 감독의 슈퍼GT 데뷔는 그리 쉽지 않았다. 동료 운도 그리 좋지 못했고, 철저한 세컨드 드라이버의 입지였다. 팀의 운영이나 전략 등은 모두 퍼스트 드라이버 중심으로 운영됐다. 황진우 감독은 “한 번은 우연히 예선 경기에 출전했는데 팀 최초로 슈퍼폴에 출전했는데 결국 슈퍼폴은 퍼스트 드라이버가 나섰다”고 말했다. 물론 슈퍼폴의 결과는 최하위, 10 그리드에서 경기를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빛났던 기량은 일본에서도 가치를 인정 받았다. 1000km 내구 레이스인 ‘포카1000’에 나선 황진우 감독은 6시간에 걸친 레이스 중 단 40분만 달리기로 했었다. 황진우는 묵묵히 달렸고, 기록으로 자신의 기량을 과시했다. 황 감독은 “팀에서 40분 동안의 기록을 본 후에는 ‘더 달려달라’며 더 많은 시간을 달리게 했다.
덕분일까? 팀에서는 두 번째 시즌에서도 황진우 감독을 붙잡기로 결정했고, 한국타이어 역시 KTR 이후에는 한국타이어 팀 소속으로 슈퍼GT 출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황진우 감독은 “좋은 기회였고 나 역시 슈퍼GT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고 싶었는데, A1 그랑프리가 눈 앞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황진우 감독은 “이제야 말하지만 ‘A1 그랑프리’에 나서기 싫었다”고 말했다. 황 감독은 “슈퍼GT에서 무언가 이뤄내지도 못했고, 새로운 도전을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라며 “결국 A1 그랑프리에 출전하게 됐는데 어쩌면 그 순간이 레이스 커리어에서 가장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잠시 뜸을 들인 황진우 감독은 “개인적으로 선수 선발에 대해 아쉬움이 있었다”라며 “왜 팀에서 날 원했는지 모르겠지만 F3 이후 박스카에만 매달려 있었고 이미 국내에서 포뮬러를 타고 있던 선수들도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A1 그랑프리는 황진우 감독에게 ‘제대로 달릴 수 없는 환경’이었다. 황진우 감독은 “뉴스로 널리 알려졌던 개막전 호성적 역시 거센 빗줄기에 다른 차량들이 제대로 달리지 못했기 때문이지 결코 내가 제대로 달려서 얻어낸 결과가 아니었다”라며 “그저 리타이어하지 않고 조심하자라는 태도로 레이스를 했던 결과였을 뿐이다”고 말했다.
시작은 화려했지만 내부 사정이 좋지 못했던 한국 팀은 A1 그랑프리 개막전 이후 급속도로 무너졌다. 팀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고, 팀의 분위기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그 탓에 A1 그랑프리에 도전한 한국팀은 점점 그 존재감이 흐려지고, 황진우 감독 역시 ‘아무런 성과 없이’ 일본 슈퍼GT가 아닌 한국 모터스포츠로 돌아오게 됐다.
국내에 돌아온 후 황진우 감독은 곧바로 국내 최고 클래스인 슈퍼6000 클래스에 도전하게 된다. 당시 국내 모터스포츠 무대에 복귀한 황진우 감독을 바라보며 다들 ‘2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라며 물어보는 상황이 이어졌다. 당시 국내 모터스포츠 마케팅이나 홍보가 얼마나 미약한 수준이었는지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현대 레이싱 소속으로 슈퍼6000 클래스에 출전한 황진우 감독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게 됐다. 첫 번째 레이스에서는 마지막까지 잘 달리고 있다 다른 차량이 코스 위에 뿌려 놓은 흙을 밟고 미끄러지며 리타이어했고, 두 번째 경기에서는 속도 규정 위반이 걸리며 순위가 크게 떨여졌다.
황진우 감독은 “첫 번째 경기는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두 번째 경기의 페널티는 다소 이해되지 않은 것이 속도계가 없는 스톡카로 ‘스타트 아치 통과 속도’를 지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라며 당시 페널티 부여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슈퍼6000 클래스 출전은 두 경기로 그쳤다. 그리고 황진우 감독은 제네시스 쿠페에 올랐다. 차량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던 만큼 황진우 감독의 레이스카는 ‘양산 출고 차량에서 볼 수 있는 은섹’이었다. 그러나 황진우 감독은 시즌 중반에 참여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2위에 오르며 실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황진우 감독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년도의 호성적에 S-Oil 레이싱 팀이 드라이버 제안이 들어왔고, 막역한 사이인 정의철과 함께 투 톱으로 팀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황진우 감독은 합류하지 않겠다는 정의철을 설득했고 새로운 시즌을 준비했다. 하지만 시즌 개막을 앞두고 S-Oil 레이싱 팀에서 ‘정의철만 계약하겠다’고 통보해왔다. 팀의 소식을 기다리던 황진우 감독은 말 그대로 허탈했다.
시즌은 개막했고, 황진우는 정처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스톡카를 다시 타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고, 이에 황운기 단장과 슈퍼레이스 측이 황진우 감독의 슈퍼레이스 출전을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황진우 감독은 “당시 슈퍼레이스에 출전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며 “아버지가 ‘레이스 커리어를 이대로 멈출 것이냐’라는 질문에 다시 출전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아버지, 황운기 단장과 함께 발보린 레이싱팅 시작을 알린 황진우 감독은 새로운 벽을 마주했다. 황진우 감독은 “레이스카는 슈퍼레이스 측에서 서포트를 해줬지만 타이어에 대한 어려움이 있었다”라며 “한국타이어, 금호타이어 등 각 제조사에서 타이어 지원을 못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어 잭 레이싱 팀이 보관하던 3년 묵은 GTM 레이스카 타이어를 빌려 출전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황진우라는 이름 값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빛이 났다. 데뷔와 함께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물론 2라운드의 우천 상황에는 김정수 단장에게 받은 중고 레인 타이어로 호성적을 올리는 모습이었다. 황진우 감독은 “그 덕분에 금호타이어에서 타이어를 지원해주겠다고 제안을 주면서 레이스 환경이 점점 좋아졌고, 종합 2위라는 성적을 거두게 됐다”라며 웃음을 지었다.
황진우 감독은 “당시 팀의 환경도 어려웠고, 운영도 쉽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함께 같이 레이스를 했다는 것 자체가 무척 즐거웠고, ‘성적’ 보다는 ‘레이스’에 집중하면서 더 즐겁고, 여유로운 그런 시즌을 보낸 것 같다”라며 “그 시기가 어쩌면 가장 즐겁게 레이스를 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당시 전력 강화를 노리던 CJ레이싱팀은 복귀 시즌에 종합 2위에 오른 황진우 감독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이듬해 황진우 감독은 CJ레이싱 팀 소속으로 붉게 물든 스톡카에 올랐다. 베테랑 드라이버 김의수 감독과 함께 호흡을 맞춘 황진우 감독은 곧바로 팀의 기대에 부응했다. 뛰어난 기량을 펼치며 종합 우승에 올랐던 것이다.
두 번째 시즌은 종합 우승은 거두지 못했지만 종합 2위라는 성적을 거뒀다. 황진우 감독은 “시즌 전체적으로 문제는 없었지만 이승철 치프 미케닉이 쓰러지면서 기술적인 부분에서 공백이 생겼고, 시즌 최종전 출전까지도 불투명했다”라며 “시즌 최종전에서 아쉽게 종합 2위에 그치게 됐지만 분명 의미 있는 시즌이었다”라고 말했다. 실제 종합 우승과 2위를 거둔 황진우 감독의 기량에 의문을 다는 사람도 없었다.
세 번째 시즌은 새롭게 영입된 김동은과의 만남이 주된 이슈였다. 황진우 감독은 “원래 김동은 선수와 친하지 않았는데 발보린 레이싱 팀 활동을 하면서 친해지게 됐다”라며 “똑같이 레이서 아버지를 둔 동생으로서 내가 겪은 과정을 공유하며 더욱 가까워졌는데 같은 팀이 되었으니 더욱 친해지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팀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결정이었다. 황진우 감독은 “이승철 치프가 이탈하고 인력 보강이 크게 이뤄지지 않았던 만큼 세 번째 시즌은 무척 어려웠던 시즌이었다”고 말했다.
황진우 감독은 2016년 팀 코리아 익스프레스의 감독이 되었다. 황진우 감독은 자신이 감독이 된 것 다들 너무 일찍 된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시간이 되었다”라는 반응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래도 레이스 커리어가 있어서 그런지 동료, 동년배 선수들에 비해 무척 늙은 느낌인 것 같다”라며 “어릴 때부터 레이스를 시작해서 오래됐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다”라며 웃었다.
황진우 감독은 “2014 시즌에 나 역시 감독이 될 거란 생각이 했는데 40~45세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2016년부터 감독직은 제안 받으니 다소 당황했다”고 말했다. 당시 회사에서는 ‘어차피 할 감독이라면 조금 더 일찍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황진우 감독은 그렇게 감독직을 수락하고, 팀 코리아 익스프레스를 이끌기로 결정하고 당초 기획됐던 외인 영입 대신 김동은과의 투 톱 체제로 시즌을 치르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황진우 감독은 “선수이자 감독으로 판단할 때 외인을 데려온다고 성적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고, 김동은 선수와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고 “종합 우승은 아니지만 종합 2위라는 결과가 그 가능성을 입증했다”고 말했다.
감독이 된 황진우에게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무엇일까? 황진우 감독은 “역시 다이어트가 걱정이다”라며 “선수 시절에는 계약서 상에 다이어트가 명시되어 살을 뺄 수 밖에 없었는데, 또 감독이 되니까 몸매 관리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내년 시즌에는 조금 더 슬림한 몸으로 개막전을 치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웃었다.
그리고 덧붙여 ‘용인에 있는 시간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황진우 감독은 “감독이 되니 선수시절보다 팀 캠프에 더 많이 있게 된다”라며 “조바심 아닌 조바심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걱정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올해 그는 서울에 있는 자택에서 잠든 날이 한 달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황진우 감독은 “팀 캠프에 매일 나가니 미케닉들이 조금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 내년에는 조금 더 줄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황진우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김동은이라는 이름이 곧바로 이어진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쉐보레 레이싱 팀을 이끄는 이재우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황진우 감독은 “이재우 감독님은 정말 뛰어난 드라이버이고 존경하는 감독이자, 가장 밉고, 어려운 그런 존재다”라며 “내 레이스에 있어서 이재우 감독님을 빼놓으면 많은 것이 비어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황진우 감독이 꼽는 ‘가장 어려운 상대’가 바로 이재우 감독이다.
둘의 관계는 어느새 신뢰로 이어졌다. 황진우 감독은 “이재우 감독님은 그 어떤 드라이버도 뛰어난 경기력을 가지고, 늘 노력하는 자세를 가진 선수”라며 “올 시즌 성적이 다소 실망스러워 보여도 경기 중 선보인 기량은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예전과 같은 ‘강력한 모습’이었다”라며 이재우 감독에 대한 확신을 드러냈다.
실제로 과거 스즈카 서킷에서 슈퍼레이스가 개최됐을 때 이재우 감독은 다른 클래스의 황진우 감독에게 서킷에 대한 코멘트를 요청했고, 둘은 다른 클래스, 다른 팀에도 불구하고 단 둘이서 코스 워킹을 하며 대회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재우 감독은 황진우 감독의 코멘트를 따르며 추월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이를 회상하던 황진우 감독은 “나의 코멘트 때문에 그런 레이스를 펼치지는 않았겠지만 이재우 감독님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이재우 감독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정신 없이 달려온 황진우 감독이 그리는 미래는 어떨까? 황진우 감독은 “사실 ‘어떤 레이스에 나서겠다’라는 목표는 따로 없다”라며 “드라이버로서 내게 주어진 환경, 팀, 레이스카에 올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궁극적인 목표라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다만 “그러나 한국의 선수들과 함께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나 뉘르 24시 내구 레이스 같은 내구 레이스에 나서고 싶은 욕심이 있다”라며 “최근 국내 선수들이 내구 레이스에 관심을 가지고 출전하는 모습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 시기가 조금씩 다가오는 것 같다”며 웃었다.
황진우 감독은 잠시 말을 멈춘 후 “김의수 감독님, 조항우 감독님, 이재우 감독님 등 정말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선배들이 있어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감사하다”고 말하며 “지금의 선배들에게 조언을 얻고 기댈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고 조언을 구하고 그리고 귀감이 될 수 있는 드라이버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