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김영곤 기자
2004.08.17 12:20:01
[edaily] 증권파동, 그러니깐 대증권을 중심으로 한 책동전의 회오리는 62년3월에 시작해서 63년2월에 끝나는 겨우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발생했다. 한바탕 광란의 소용돌이가 어느 순간에 왔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진 꿈속 같은 일이었다.
이 짧은 기간에 대증권 주가는 22전 수준에서 6원까지 올랐다가 다시 2전으로 거꾸로 박혀 완전한 휴지가 됐다. 어떻게 그렇게 허무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증시파동은 흔히 투기자들의 전횡과 이를 막지 못한 제도상의 허점 및 불비, 그리고 관리능력 부족등이 어우러져 발생한 불행으로 지목되고 있다. 물론 그런 지적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어떻든 책동전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것이 과열하면 당시의 제도로는 이를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었던 것도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시파동이 단지 그런 이유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너무 미흡한 설명이 아닐까.
사실 증시제도를 정비하고 또 투자풍토를 조성한다고 해서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뜨거운 열풍이 몰아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처럼 책동전은 결코 무(無)에서 느닷없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당연히 하나의 분명한 주도세력이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불모의 사막에 물을 대고 생물이 자라게 한 계획적인 관리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처럼 증시파동은 그 이후 오랜동안 군사정권 초기의 4대 의혹사건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어 왔다. 그 책동전은 중앙정보부의 개입 아니면 최소한 간접지원에 의해서 촉발됐기 때문에 그처럼 대담하고 무모하게 전개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혹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채 설마 그랬겠느냐, 지나친 의혹이나 근거없는 낭설이 아니겠느냐로 덮어 둘 수 밖에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군사정부가 증시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단순 소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그것이 증시파동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는 얘기다.
군사정부의 정책은 마치 군사작전과도 같이 단순 명쾌한 것이었다.
군사정부는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내자동원에 역점을 두었다. 그것은 앞에서도 얘기한 바 극히 국수적, 이상적인 생각 같았는데 그런 생각에서 증시 활성화를 방법론으로 채택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자조달에 지나치게 임팩트를 준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는 것이다. 당시 내자의 절대적인 부족을 감안하면 이는 애초부터 무리이고 감당할 수 없는 벅찬 것이었다. 흔히 말하듯 그러니깐 스토크 자체가 적은 상황에서 이같은 계획 자체가 실현성이 없었다는 얘기다.
여기에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증시가 그런 자금흐름을 유도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증시를 내자조달의 창구로 활용하겠다는 것은 적어도 중학이상의 수학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초등학교 셈본으로 풀려고 한 것과 같다.
증시를 활성화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산업자금 창구로 연결되도록 해야 되는데 당시로서는 전혀 그런 고도의 파이프라인 구상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군사정부의 이런 극히 단순하고 단편적인 사고와 정책이 어느날 갑작스럽게 증시에 투기열풍을 몰아오게 된 것인데 그렇게 갑작스런 투기열풍 속에서 정부는 스스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속수무책으로 방관하다가 불을 끄려고 기름을 끼얹는 실수를 하다가 종국에는 돈을 찍어서 그 투기를 무마했다. 그리고 문을 닫아 걸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게 되는가. 정책에서 시행착오란 있어선 안되는데 정부정책 실패가 국민들에게만 엄청난 피해를 강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정부의 시행착오가 허다히 계속되는 것을 보며 그것도 군사정부의 산물인가 입맛을 씁쓸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