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윤영환 기자
2004.09.24 13:59:36
[edaily] edaily는 9월 23일부터 굿모닝신한증권 크레딧 애널리스트 윤영환 연구위원의 칼럼을 게재합니다. 윤영환 위원은 탁월한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증권사 크레딧 애널리스트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2002년과 2003년 연속으로 굿모닝신한의 채권분석팀을 `베스트팀`으로 이끌었으며 신용평가사인 한국신용정보에서 활약하다 증권사로 자리를 옮겨 양 업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가 edaily를 통해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크레딧시장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려드립니다. 윤영환 위원만의 날카로운 시각과 분석을 통해 과거 수많은 크레딧스토리의 배경과 전말,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일련의 현상들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미국의 엔론사태 당시 주변에는 고소해 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았다. `글로벌스탠다드`로 포장된 `아메리칸스탠다드`에 얼마나 시달렸던가. 연이어 터져 나오는 미국 자본주의의 추한 모습에서는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느낄 수 있었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도 일부 있었지만, 당시의 기고만장한 시장 분위기에서 전혀 힘을 얻지 못했다. 자연히 2002년 상반기 미국 시장에서 숨가쁘게 진행된 위기의 성찰과 시스템 재구축을 주목하는 이는 드물었다.
◇ 미국의 엔론과 한국의 카드위기는 닮은 꼴
그로부터 불과 1년 반도 지나지 않아 이제는 우리가 카드위기에 휩싸였다. 두 사건은 위기의 본질에 있어 너무나 닮아 있다. 돌아 보면 엔론사태가 터진 2001년 말 우리 카드산업은 이미 걷잡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달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진하게 남는다. 엔론사태에서 교훈을 제대로 얻었다면 위기의 충격은 훨씬 완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아쉬움을 접어두고 다시 한번 타산지석의 교훈을 생각해야 할 때다. 엔론사태 이후의 철저한 원인성찰과 시스템 보완은 미국 자본주의의 힘을 보여 주었다. 솔직히 부러움을 느낄 정도다.
핵심적인 화두는 유동성리스크와 기업투명성의 제고였다. 우리의 경우에도 과제의 성격은 별반 다르지 않지만 대응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하다못해 최소한 위기의 성격규정이라도 제대로 해야겠지만 여전히 관념적인 명분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위기 이후의 외양간 고치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우선 위기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논의에 앞서 미리 전제할 것이 있다. 엔론사태나 카드위기나 위기의 모든 책임을 소위 "휴스턴의 악동들"이나 카드사 경영자 또는 담당관료에게 돌려서 그저 가학적인 카타르시스나 얻는 방식은 곤란하다. 물론 이들의 책임도 크지만 시장의 제도와 관습, 문화 등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항상 그렇듯이 추락의 원인을 찾으려면 추락 이전의 호황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호황의 수혜를 누린 모두가 크던 작던 추락의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찰이 있고 발전이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금융시스템의 발전이라는 것이 모두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의 역사가 아니던가.
◇ 금융위기에는 항상 엄청난 자금공급이 있다
금융위기의 제 1 법칙은 과도한 신용창조에 의한 엄청난 자금공급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금융위기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과정이다. 먼저 19세기 고전파 경제학자인 Walter Bagehot의 통렬한 정의를 들어보자.
"특정한 시기에 엄청난 수의 멍청한 사람들이 엄청난 양의 멍청한 돈을 보유한다. 그러면 투기가 일어난다. 그러면 공황이 일어난다"
엔론 등 신경제의 폭발적 확장은 증권인수업과 은행업을 별도의 사업영역으로 구분했던 글래스-스티걸(Glass-Steagall) 법의 폐지와 맞물려 있다. 신용카드의 급격한 성장도 공적자금투입 은행의 경영정상화와 제 3자 매각의 틈새에서 이루어졌다.
은행의 적극적인 확장경영으로 풀려나온 대규모 자금이 성장부문에 투입되면서 급가속 페달을 밟는 양상이었다. 성장이 자금공급을 합리화하고 자금공급이 다시 성장을 부르는 극단적인 선순환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떤 요인에 의해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순간 한껏 부풀어진 풍선은 터져버린다.
엔론과 신용카드 버블 붕괴의 시점을 잡기는 쉽지 않다. 대략 사회적 찬미가 질타로 바뀌는 시점으로 본다면 엔론의 경우 캘리포니아 전력위기, 신용카드는 길거리 모집을 둘러싼 갈등이 중요한 모티브였다. 그러나 진정한 붕괴는 은행의 추가적인 자금공급 중단에서 비롯되었다. 엔론의 경우 월스트리트저널의 추적보도와 신용평가의 등급하락이, 신용카드의 경우 동일인여신한도 기준강화가 신용위축의 방아쇠 역할을 했다.
◇ 위기때는 언제나 금융시스템에 모순이 있었다
금융위기의 제2법칙은 금융시스템의 모순이다. 금융시스템의 모순은 자금흐름과 정보흐름 모두에서 발견된다. 엔론의 경우 위장계열사를 통한 자산거래와 차입이 핵심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은행이 위장계열사에 대출하고 위장계열사가 엔론의 자산을 매입하는 방식이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는 반대방향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면서 대출과 이자를 변제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가공의 자산과 이익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 하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프로포르마(pro-forma)로 불리는 추정손익 위주의 실적발표 관행이었다. 공식적인 대차대조표와 현금흐름표가 실제 수익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일부의 문제제기는 가볍게 무시되었다.
신용카드에 대한 은행의 신용공여는 동일인여신한도 규정의 빈틈을 활용했다. 대출채권 직매각(loan sale)을 개인대출로 처리하고 동일인여신한도 적용을 받지 않던 공모회사채를 매입하는 방식이었다. 신용카드 부실의 은행 전이를 우려한 당국이 2002년 후반에 이를 규제하면서 은행자금의 신용카드 이탈이 본격화된다. 이로 인한 공백을 메우면서 CP와 MMF가 급팽창하고, 일부 투신의 편법적인 옵션CP거래가 이에 일조했다. 그러다가 2003년 3월 SK글로벌 쇼크를 계기로 MMF의 대규모 인출사태를 맞은 것이 바로 카드위기다.
미국의 프로포르마와 마찬가지로 신용카드도 정보투명성이 문제가 되었다. 유동화거래를 포함한 관리기준 자료의 모호함과 카드사별로 상이한 회계기준, 대환대출 운영실태 등이 리스크에 대한 시장의 판단을 어렵게 했다.
◇ 금융위기의 원인은 `부실`, 실체는 `대규모 자금이탈`
금융위기의 제 3법칙은 집단적인 편향이다. 시장이 획일적인 하나의 논리(mono-theories)에 의해 지배되고 시장참여자들이 군집행동(herd behavior)을 보이는 것은 버블의 일반적 현상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단계가 되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저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할 뿐이다.
집단 최면의 상황에서 시장의 주도적 흐름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버블의 정점에 이르기 전에 시장에서 퇴출되고 만다. 버블에 맞섰던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는 명예를 지켰지만 직장을 잃었다. 이들 중 많은 이가 다시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심지어 버블이 붕괴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금전적인 이해관계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언론이나 신용평가, 학계 등이 나름대로 균형추 역할을 해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당국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데 잘해도 욕먹는 것이 버블의 관리다. 당장 무리한 시장개입이라는 비난에 직면한다.
영리한 투자자는 이때쯤을 버블의 정점으로 보고 낙하산을 편다. 하지만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한발 늦게 우산이라도 잡으려고 몰려든다. 위기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마구잡이로 포지션 축소에 나서면서 시장은 갑자기 공황상태에 들어간다. 금융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부실이지만 실체는 어디까지나 대규모 인출사태(fund-run)에 의한 금융시장 붕괴다.
이를 사전적으로 또는 사후적으로 적절히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금융시장의 역량이다. 이런 화급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당국의 조치를 두고 시장의 원칙을 훼손했다고 비판하는 주장을 자주 접한다. 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런 주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집단적 흥분상태에서는 논리적 설득보다 한발의 총성이 더 유효할 수 있다는 점만은 부인하지 말았으면 한다.
◇ 잊혀져 가는 카드사태..위기는 반복된다
끝으로 법칙이라고 하기는 좀 어색하지만 위기는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위기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제도적 보완이 부족할 때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우리 시장은 벌써 카드위기를 잊어가고 있다.
물론 최근의 채권시장 랠리는 2002년의 상황과 사뭇 다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곳곳에서 여전히 미흡한 부분을 발견한다. 끊임없는 외양간 고치기는 시장참여자의 숙명이다. 스스로 돌아보아 이제 더 이상 위기에 대한 성찰이 지겹고 외양간 고치기가 귀찮다면 더욱 주의해야 한다.
아프리카의 속담 하나를 소개하면서 글을 맺으려 한다. "맹수에게 쫓기던 양이 이제는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그 순간이 바로 가장 위험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