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이슈)유령이 떠돈다

by이학선 기자
2006.03.28 11:56:24

금리인상 배후엔 `부동산`..한은 금융안정 차원서 접근
`이성태號, 기류변화 반영할까`..채권시장 시선집중

[이데일리 이학선기자]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로 시작되는 공산당선언은 역사상 보기드문 역작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의 세계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하고 노동자 계급의 실천적 강령을 제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쳐 20세기를 혁명의 시대로 이끄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한국 채권시장에도 유령이 떠돌고 있다. 유령은 한국은행이  지난해 보여준 통화정책 수행의 획기적 변화와 깊숙이 관련돼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한국은행의 금리인상 행보는 과감하고 신속했다. 경제회복의 강도에서, 물가상승 압력에 대한 기대에서 확실한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며 한달건너 콜금리를 올리는 징검다리식 베이비 스텝(Baby Step)을 선보인 것.

주지하다시피 한은의 금리인상 명분은 저금리 폐해에 대한 시정이다. 한은은 저금리가 유발할 수 있는 경제불안, 금융불안을 두려워했다. 위기에 대한 우려는 금리인상의 절박감을 키웠다.

실제로 작년 한은 행내 세미나에서 한 민간전문가가 사견을 전제로 "한은이 오히려 기업의 투자회복을 가로막고 있다. 콜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의견을 내자, 그 자리에 있던 한은 직원들은 `전혀 예측불가능한 사건이 터졌을 때 연 3.25%의 정책금리로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냐`며 반론을 폈다.

한은이 생각하는 예측불가능한 사건을 명확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저금리의 病(?)은 실물경제, 주가와 금리, 부동산가격, 환율 등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금리인상을 원하는 한은은 정부와 국민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와 명분이 필요했을 터. 누구랄 것도 없이 가장 먼저 연상할 수 있었던 것은 부동산투기로 대표되는 자산가격 거품이었다. 사상 최저수준의 저금리가 낳은 엄청난 유동성은 계속해서 부동산시장으로 몰려들고 있었고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거품징후는 농후했다.

지난해 소수의견을 남기면서까지 금리인상을 주장했던 김태동 금융통화위원은 금리인상의 핵심근거로 부동산 문제를 들었다.



7월엔 부동산가격이 전국적인 현상이라며 인상론을 폈고 8월엔 정부의 8·31 부동산 종합대책 발표를 앞뒀음에도 불구하고 거품이 축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리인상론을 폈다. 이어 9월엔 정부의 8·31정책효과가 성공할지 미지수라며 또다시 금리인상을 주장하게 된다.

이후 금통위는 10월부터 징검다리식 금리인상을 단행, 3.25%였던 콜금리를 4.00%까지 끌어올린다. 최근 한은은 부동산 문제를 금융안정과 연결시켜 더욱 정교한 논리를 펴고 있다.

금융안정은 금융중개기능이 원활히 작동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금융기관은 시장위험과 유동성위험, 운영위험 등에 노출되는데 이 같은 위험이 거시경제 전반에 파급될 경우 한은의 통화정책은 무용지물이 된다. 예컨대 디폴트 상태인 금융기관에 돈을 쏟아부어봤자 실물경제엔 돈이 풀리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은이 발간하는 조사통계월보 2월호에는 흥미있는 보고서가 실렸다. (조사통계월보 2월호, 부동산가격 변동과 은행 경영성과간 관계분석)



은행의 경영성과는 지난 90년대 이후 부동산 경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부동산가격 상승률이 확대될 경우 은행대출금증가율이 높아지고 자산건전성과 수익성 등 경영성과가 개선된다. 하지만 부동산가격 하락률이 확대될 경우엔 그 반대효과가 나타난다.

비록 부동산가격 하락기의 수익성 악화폭이 부동산가격 상승기보다 크다며 부동산값이 떨어질 때 통화정책적 대응에 더욱 신중해야한다는 뉘앙스를 풍겼지만 어쨌거나 부동산 문제를 금융안정의 큰 틀에서 해석한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자료: 한은 조사통계월보 2월호)


지난 24일 한은과 한국개발연구원(KDI), 금융학회 공동주최로 한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도 부동산 문제가 언급됐다. 강종구 한은 금융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은 "자산가격이 기초경제여건에서 괴리됐을 경우 통화정책적 대응이 바람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같은 자리에서 강동수 KDI 박사가 "중앙은행이 자산가격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거나 최소한 자산가격의 급등락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통화정책을 실시해서는 안된는 견해가 주류"라고 소개한 것과 대조적이다.

한은이 판단한 우리나라의 부동산 시장은 어떤 상태일까. 한은의 씽크탱크인 금경연은 이미 해답을 제시해놓고 있었다.

금경연은 이달 중순 `주택가격의 거품여부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통해 전국 아파트 가격이 장기 균형가격을 8% 정도 상회해 주택가격에 거품이 형성됐다고 분석했다. 강남지역 아파트의 경우 실제가격이 균형가격보다 2001년 이후 7.6%, 2004년 이후 13.7% 정도 상회하는 등 그 괴리폭이 전국 아파트에 비해 1.5~2배 정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논문을 작성한 이준희 통화연구실 과장은 "다만 주택가격 상승이 경제전반에 걸쳐 인플레이션이나 거품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되는 경우 통화정책적으로도 선제적으로 대응해 나가는 것이 설득력과 공감대를 얻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은은 박승총재의 입을 빌어, "부동산문제만을 위해 통화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절실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동산가격과 물가, 부동산가격과 금융안정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다.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이라는 큰 틀의 핵심 변수로 부동산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자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방은행 통화정책노트, 교보증권)


지난해 이후 한은이 부동산시장에 대해 두려움을 키워왔다면, 채권시장은 그런 한은의 태도변화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껴왔다. 한은에서 부동산과 관련한 얘기나 나오기만 하면 "그럼 이번에도 금리를 또 올리겠다는 건가"며 몸을 움츠렸다.

지난주 금요일(17일) 장마감을 불과 3분 앞두고 채권시장이 보여준 모습은 인상적이다.  앞서 한은과 KDI, 금융학회 세미나에서 금경연의 강종구 실장 발표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자 한순간 거래량이 늘며 조용하던 분위기가 일순간 바뀌었다. ▲관련기사: 자산가격변동에 통화정책 대응 바람직"(1보)

시장의 이런 민감함은 `자산가격을 잡는 통화정책`이란 유령에 대한 두려움과 매파로 인식되어 버린 이성태 차기 총재 내정자(현 부총재)에 대한 경계 때문으로 보인다. 이성태 시대의 한국은행은 박승시대에 비해 보다 공격적인 금리인상을 할 수 있고, 부동산 가격 상승은 전보다 더 강력한 금리인상의 명분이 될 지도 모른다는 판단일 것이다.

이 부총재가 부동산 문제를 통화정책에 십분 감안할지 아직 확실치는 않다. 설사 정책결정의 핵심요인이라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이를 천명할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채권시장이 통화정책 주위를 배회하는 부동산문제를 유령으로 인정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