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만에 선화랑에 오픈런…'이영지 세상'으로 줄서는 까닭

by오현주 기자
2023.05.26 10:23:45

△선화랑서 개인전 '스테이 위드 미' 연 작가 이영지
나무숲 하얀새, 사람 사는 이야기같은 교감
서양화처럼 자유로운 한국전통채색화 작업
아교포수 뒤 밑색 3∼4번 올리고 세필 분채
100호 한 점 완성에 꼬박 한 달 걸리기도 해
개막 오픈 전 긴줄…첫날 소품 싹쓸이 판매

작가 이영지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서 연 개인전 ‘스테이 위드 미’에 건 자신의 작품 ‘항상 우리가 곁에 있어’(2023·162.2×130.3㎝) 옆에 앉았다. 작품은 줄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하얀새를 향해 친구 하얀새들이 꽃과 과일바구니를 바리바리 싸들고 날아가는 장면. 작가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필요한 교감을 하얀새의 잔잔한 몸짓으로 대신 전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밝은 날보단 어둑한, 맑은 날보단 흐릿한 때가 대부분이다. 이미 하루의 기대를 접은, 적당히 포기해버린 바로 그 순간 ‘움직인다’. 누가? 하얀새가. 하나, 혹은 둘이, 아니면 몇몇이 무리를 지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거다. “고작 휙 날아오르다가 주저앉는 게 전부 아니겠느냐” 한다면,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어째 사람인 내가 하는 일이란 게 여린 저들보다 작고 답답한가’ 이내 깨닫게 될 테니. 멀리 갈 것도 없다. 손에 닿는 몇 장면만 들여다보자.

나뭇가지를 철봉 삼아 가로로 몸을 뻗는 고난이도 체조동작은 기본이고(‘몽글몽글 모짝모짝’ 2023), 지치면 안락의자에 널브러질 줄도 알고(‘바라만 봐도 소중한’ 2023), 무료하다 싶으면 작은 돛단배를 타고 어두운 밤바다를 헤쳐나간다(‘바람을 따라 산책하듯’ 2023). 마침 특별한 날이라면, 불 밝힌 전구를 치렁치렁 매달기도 하고(‘반짝반짝 빛나는 날들’ 2023), 꽃가지로 예쁜 줄도 만들고(‘보이니 내사랑’ 2023), 애틋한 애정행각도 서슴지 않는다(‘보이지 않아, 우리’ 2023). 참, 요즘 주요 활동 한 가지가 더 늘었다. ‘골프’다. 몸채 만한 빨간공을 그린에 올리고 여린 날개로 곧추 잡은 골프채를 내려치기 직전의 순간이 여기저기서 포착되기도 한다(‘오늘만 같아라’ ‘낙엽지면 친구 돼줄게’ 2023).

선화랑 이영지 개인전 ‘스테이 위드 미’ 전경. 달빛 아래 펼쳐지는 풍경을 묘사한 ‘꽃이 되어 보려고’(2023·100×100㎝·왼쪽)와 ‘여기 우리의 추억이 있어’(2023·112×145.5㎝)가 나란히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선화랑 이영지 개인전 ‘스테이 위드 미’에 걸린 ‘오늘만 같아라’(2023·60.6×72.7㎝). 전경. 이번 개인전에선 하얀새의 새로운 취미가 소개됐다. ‘골프’다. 가누기도 버거운 골프채를 휘두르기 직전의 하얀새가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자, 이쯤 되면 뭔가 보이기도, 뭔가 떠오르기도 해야 하는 거다. 하얀새로 분한 저들이 바로 우리고, 저들이 꾸미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고 싶은 이상향이란 게 말이다. 이러쿵저러쿵 말은 쉽게 뱉을 수 있으나 그게 말처럼 뚝딱뚝딱 세워지는 세상이 아니란 것도 말이다.

작가 이영지(48). 그이가 만든 그 세상은 이처럼 독보적이 됐다. 때론 홀로 떨어져 오도카니 선 나무, 때론 그 나무가 겹겹이 쌓아낸 진한 숲은 그 출발이다. 그 속에 예의 그 하얀새를 들여, 마치 우리 사는 이야기처럼 아기자기한 교감을 끄집어내는데.

선화랑 이영지 개인전 ‘스테이 위드 미’에 걸린 ‘내가 많이 행복해’(2023·145.5×112㎝)와 그 부분. 와인 한잔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 앉은 하얀새가 보인다. 작품에선 이번 개인전을 앞두고 시도한 ‘색 변화’가 보인다. 작가 시그니처인 초록 계열 대신 푸른색으로 바탕을 만들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단순하게 저 숲에 들어가 저 소파에 앉아 쉬고 가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만큼 처음에는 새가 없었다. 나무만으로도 얘기가 됐으니까. 그 나무가 나였던 거다. 하지만 가끔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외롭더라. 그때부터 주변의 이야기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미 입소문이 나버린 건가. 그 하얀새가 만든 세상 구경에 갤러리 문턱 닳듯 들고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내 세상으로 만들기’에 나서는 이들이 적잖은 모양이다. 작품이 걸린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눈썰미 있는 컬렉터들이 밀려든다고 하니.

이영지의 ‘하늘에 수놓은 고운 빛이었으면 해’(2023·97×162㎝·위)와 ‘사랑하게 해줘서 고마워’(2023·80×130㎝) 중 하얀새 부분을 확대해봤다. 서로를 부르는 날갯짓, 나뭇가지를 철봉으로 삼은 체조동작 등 사람과 다를 게 없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서 열고 있는 개인전 ‘스테이 위드 미’(Stay with Me) 역시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풀이 잔뜩 죽은 요즘 미술시장에, 갤러리 앞에 늘어선 ‘오픈런’이란 장관을 기어이 보고야 말았던 거다. 이 ‘증언’은 46년째 인사동에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선화랑의 원혜경 대표가 했다. “개막일, 문을 열기도 전인 이른 아침, 화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트페어가 아닌 화랑에서 오픈런은 1970년대 말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순식간에 몰려든 인파가 휩쓸고 간 덕에, 전시장에 걸린 10∼20호 소품들은 대부분 첫날부터 빨간딱지를 붙인 채 관람객을 맞고 있다.



선화랑 이영지 개인전 ‘스테이 위드 미’ 전경. ‘이 설렘을 오래오래’(2023), ‘너무 좋아 네가 좋아’(2023), ‘바람을 따라 산책하듯’(2023) 등 10호(53×45.5㎝ 규모의 이들 작품은 개막 첫날 모두 팔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기다려봐 나만 믿어’(2023), ‘꽃이 피면 나비가 돼 줄게’(2023), ‘너의 눈높이를 맞추고’(2023), ‘소원을 말해봐’(2023), ‘행복도 새로워’(2023). 세상에 어느 누가 나에게 이보다 더 다정한 말을 건네줄 수 있겠나. 게다가 어디 말뿐인가. 몸바쳐 파닥거리는 ‘작은 생명체’가 있지 않은가.

“새도 새지만, 처음부터 마음을 쓰이게 한 건 나무였다. 가녀린 줄기에 저토록 무겁게 퍼져 있는 울창한 잎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강한 심지가 들어 있어 저렇게 버티고 있을까 싶어 애잔할 때도 있다.”

작가 이영지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서 연 개인전 ‘스테이 위드 미’에 건 자신의 작품 사이에 섰다. ‘이토록 고운 마음 가득 전해지기를’(2023·112×112㎝·왼쪽)과 ‘아낌없이 사랑하기’(2023·112×112㎝)다. 작가는 덩어리 같은 나무와 들조차 세필로 한 점씩 찍고 그어 완성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선화랑 이영지 개인전 ‘스테이 위드 미’ 전경. 관람객들이 마치 이영지 그림 속 하얀색처럼 다정하게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왼쪽으로 500호 대작 ‘봄처럼 피어나’(130.3×486㎝)가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래, 그 애잔한 스토리에 치중하려면 붓질은 편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얼핏 보기엔 하얀 캔버스에 붓으로만 승부를 내는 서양화처럼 자유롭지만, 작가의 작품은 한국 전통 채색화다. 그것도 ‘손이 많이 가는 분채 채색화’. 일단 아교포수 뒤 먹을 입히고 밑색을 올리는 과정을 3∼4번 이상 반복한단다. ‘말리고 올리고’ ‘말리고 올리고’ 끝에 비로소 그림이 올라갈 밑바탕이 만들어지는데. 끝이 아니다. 작가 작품에 보이는 특유의 ‘갈필’ 작업이 남았다. 성긴 붓으로 표면을 긁어내 “아주 오랜 세월을 겪은 듯 죽 찢어 만든 한지의 맛”을 내는 거다. 여기까지의 작업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이만큼 끝내고 나면 곳간에 곡식을 채운 것처럼 뿌듯할 정도”라니까.

밑작업이 힘들다면 아이디어라도 풍풍 샘솟는가. 아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단다. 가끔 멀쩡하던 나무가 틀어지고 새가 날아가 버리는, 그런 문제들이 수시로 터지는 거다. “그래서 생각이 다 말라버린 날은 계속 밑작업만 한다. 머리는 쉬어도 손은 안 쉬게 하려는 거다.”

선화랑 이영지 개인전 ‘스테이 위드 미’ 전경. 전시장을 둘러보던 한 외국인 관람객이, 봄·여름·가을·겨울의 장면을 담은 네 점의 연작 중 ‘눈이 오면 지붕이 돼줄게’(2023·60.6×72.7㎝) 속 하얀새 한 쌍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눈치챘겠지만 작가의 ‘성실성’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개인전이란 타이틀을 내건 전시라면 나오는 출품작 수가 족히 50점은 되니까. 이번 개인전 역시 다르지 않다. “다시는 안 하려 한다”며 손사래를 치는 500호(130.3×486㎝) 규모 ‘봄처럼 피어나’(2023)를 앞세워 100호 안팎의 작품 20여점 등, 55점을 기어이 걸고야 말았다. 100호 한점을 완성하는데 족히 한 달은 걸린다니,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가히 그림과의 지난한 씨름으로 하루를 다 보낸다고 할까.

이영지의 ‘몽글몽글, 모짝모짝’(2023·80×130㎝). 작품에선 이번 개인전을 앞두고 시도한 ‘색 변화’가 보인다. 짙푸른 바탕에 핑크색을 들여 좀더 따스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스텐실 붓’을 시용해 찍어내기 식으로 너른 풀숲을 표현한 화면도 처음이다(사진=선화랑).


그렇다고 변화없는 답습만인 것도 아니다. 이번 개인전에 시도한 대표적 변화는 ‘색’. 시그니처인 ‘초록’나무, ‘초록’숲을 벗어나 짙푸른 바탕에 올린 ‘핑크’색 전경을 끌어냈는데. 그간 무던히 참았던 핑크란다. 살짝살짝 썼던 것을 이번엔 대놓고 썼다는데. “내가 그토록 핑크에 집착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못했던 게 있어서가 아닌가 싶더라. 친구들이 빨간운동화, 꽃분홍 원피스를 입을 때 어두운 파란색밖에 못 입었는데, 실용적인 엄마의 성향 덕이라고 할까.”

엄밀히 따지면 현실 밖 까마득히 먼 곳의 일이다. 하얀새도, 나무도 모두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거라니까. 하지만 진짜 사람이 사는 이 척박한 세상은 이미 그 따뜻한 상상을 받아들이기로 했나 보다. 전시 개막하고 이제 열흘 남짓, 작품 절반 이상이 컬렉터 품에 안겼단다. 전시는 6월 8일까지.

작가 이영지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서 연 개인전 ‘스테이 위드 미’에 건 자신의 작품 ‘바보처럼 너만 생각해’(2023·112×162㎝) 앞에 섰다. 작가는 “새도 새지만, 처음부터 마음을 쓰이게 한 건 나무”라며 “도대체 얼마나 강한 심지가 들어 있어 가녀린 줄기로 저토록 무겁게 퍼져 있는 울창한 잎을 지고 있는가 싶어 애잔할 때도 있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