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위기, 왜 이렇게 끈질기고 지독한가

by정영효 기자
2008.07.07 14:00:47

문제의 원인은 금융시장 부실 아닌 정책실패
경기후퇴보다 `민스키 모멘트`의 영원한 반복 우려해야
전세계 중앙銀 `그린스펀 독트린` 폐기해야

[이데일리 정영효기자] 1년 반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전세계 시장의 부진이 단순히 금융시장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시장은 이미 바닥을 확인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시장은 지난해 2월 이후 대략 4차례의 대형 위기에 출렁거렸고, 그 끝이 언제일지 가늠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올 하반기부터는 전세계 경제가 회복세를 나타낼 것이라는 전망 역시 날이 갈수록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FT)는 7일 칼럼을 통해 "전세계 경제가 경기후퇴(recession)보다 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으며 그것은 `민스키 모멘트`의 영속적인 반복`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민스키 모멘트`란 미국의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가 금융 불안정성 이론을 통해 주창한 개념. 투자자들의 급격한 기대 변화로 인해 발생한 불확실한 자산의 손실이 전체 자산 가치의 붕괴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특히 자산 가치가 급락하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상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건전한 자산마저 헐값에 내던지는 상황을 `민스키 모멘트`라고 한다. 신용위기 이후 전세계 금융시장의 상황과 닮아있다.

FT는 국제 금융시장을 불과 1년 반 동안 4차례에 걸쳐 휘청이게 만든 현 상황을 금융시장의 문제가 아닌 정책의 실패 때문으로 보고, 이를 치유하지 못할 경우 `민스키 모멘트`가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채 2년이 못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와 국제 신용위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

지난해 2월 HSBC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손실이 발생했다고 발표하면서 서브프라임 사태는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만 해도 서브프라임 사태는 금융시장 일각의 문제로 치부됐다.

그러나 8월 BNP 파리바가 자사 펀드의 환매를 중단한 것을 계기로 서브프라임 사태는 금융시장 전반으로 확산된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국제 신용위기로 발전하는 순간이었다.

지난해 연말과 올초 대형 금융사들이 약 4000억달러 규모의 손실을 상각하고, 미국 5대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파산 위기에 놓이면서 신용위기는 정점에 달한다. 전세계는 국제 신용위기가 실물 경제로 전이될 가능성에 떨었다. 미국 경제가 후퇴기에 접어들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최고조로 치닫는 신용위기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지난 3월 중순 베어스턴스를 구제하고 기간제국채임대대출(TSLF)과 프라이머리딜러대출(PDCF) 등 유동성 공급 방안을 내놓으면서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전세계 증시는 4월들어 신용위기 이후 잃었던 낙폭을 상당 부분 만회하며 안정을 되찾았고 미국의 경제성장률도 1분기 1.0%(확정치 기준) 증가하며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경기후퇴에 빠지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신용위기가 최악의 상황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융사들의 부실은 계속해서 드러났고 주식시장의 호황도 베어마켓 랠리(약세장 속의 단기 상승세)로 판명났다.

미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고용을 창출하지 못하는 수준의 저성장이 계속되는 `슬로모션 경기후퇴`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신용위기 공포에서 막 벗어난 전세계 경제가 맞닥뜨린 것은 초(超)고유가 시대였다. 성장이 부진한 상황에서 고유가가 인플레이션 압력을 고조시키면서 이제 전세계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 속의 고물가)의 위협에 떨고 있다.

국제 경제가 겨우 금융시장의 위기로부터 빠져나왔는데 `재수없게` 고유가의 덫에 걸렸다는 진단은 설득력이 없다.

상품 가격의 이상 급등은 지난해 9월 FRB가 경기후퇴를 막는다며 기준금리를 끌어내리기 시작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초고유가 시대는 새로이 생겨난 문제가 아니라 서브프라임 모기지발(發) 국제 신용위기의 연장선장인 것이다.





국제 신용위기는 금융시장의 실패가 아닌 정책의 실패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도 연례 보고서를 통해 "서브프라임 사태는 신용위기를 촉발시킨 뇌관이었을 뿐 근본 원인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FT가 주장하는 정책의 실패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거시경제학 이론인 신(新)케인즈주의의 실패다.

신케인즈주의는 민간 경제주체들이 정부가 발표하는 정책까지도 고려해 미래의 물가상승 등을 예측하고 이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통화정책은 물가상승률만 높이고 실업률을 줄이는 데는 기여하지 못한다는 통화론자와 합리적 기대론에 반하는 개념.

민간 경제주체들이 가격을 합리적으로 기대한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가격이 수시로 바뀌지 않기 때문에 통화정책이 단기적으로는 효력을 발휘한다는 이론이다.

전세계 중앙은행의 주요한 분석틀로 자리잡고 있는 신케인즈주의에 따르면 통화와 신용은 시장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금융시장의 역할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신케인즈주의는 통화 및 신용의 팽창을 무시하는 대신 자산버블이 붕괴되는 상황을 수습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또한 대부분의 상품 가격은 지속적으로 조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조정 양상을 나타낸다고 본다.

이는 신케인즈주의가 명목(headline) 인플레이션 대신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 등 변동성이 심한 상품을 제외한 물가지표인 실질(core) 인플레를 중시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러한 신케인즈주의를 가장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중앙은행이 `그린스펀 독트린`으로 대표되는 FRB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이 "버블이 붕괴되기 이전까지는 거품이 끼고 있는 상황임을 입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금리를 올려 이를 막으려는 시도는 득보다 실이 많은 전략"이라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 FRB의 기본 운영방침이다.

통화정책을 결정하는데 있어 명목 인플레 대신 실질 인플레를 중시하는 FRB의 `그린스펀 독트린`은 신용위기를 방조한 원인으로 지목돼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관련기사 ☞ 신용위기 이후의 FRB..`어떻게 변할 것인가`)



그렇다면 악성 무좀균 마냥 떨어질 줄 모르는 신용위기를 종식시키기 위해 전세계 경제는 어떠한 정책을 펼쳐야 할까. FT는 신케인즈주의와 반대되는 정책이 해답이라고 주장했다.

금리를 내리고 부실에 빠진 주택보유자와 은행을 구제하고, 이를 위해 국가채무를 늘리는 대신 도덕적해이(모럴해저드)는 잠시 잊자는 신케인즈주의식 해법을 모두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것이 FT의 설명이다.

금리를 낮추거나 부실 투자자 및 은행들을 구제하는 것은 고통을 잠시 늦추는 대신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언 발에 오줌누기`식 처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세계 중앙은행들은 자산가치가 하락하는 속도를 늦추려는 시도를 멈추고, 실질금리가 인플레 기대심리를 압도하는 수준까지 통화정책을 긴축적으로 운영해야 할 것이라고 FT는 주장했다.

일부 은행들의 파산은 감수해야하며 통화정책도 장기적으로 변동성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전세계 중앙은행들이 신케인즈주의에 입각한 통화정책을 폐기하지 못할 때 전세계 경제가 치뤄야 할 대가는 경기후퇴로 끝나지 않는다. 불과 네 차례 충격으로도 전세계 경제를 탈진 상태로 몰고간 `민스키 모멘트`를 영원히 반복해서 겪는 것, 그것이 정책실패를 치유하지 못하게 될 경우의 결과라고 FT는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