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문제, 日 경제 회복 발목잡는다

by김국헌 기자
2008.01.07 13:46:11

선진국中 비정규직 의존도 가장 높아..근로자의 2/3
소비 부진으로 수출에 기대..절름발이 경제 한계
종신고용제→비정규직+정규직 병행→새로운 구조 나와야

[이데일리 김국헌기자] 은행권의 위기로 10년 넘게 장기 불황을 겪었던 일본 경제는 2000년대 회생 신호를 보냈지만, 쉽게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국 경제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경기후퇴(Recession) 위험에 몰리자, 일본 경제도 미국 경제와 함께 다시 뒷걸음질을 칠 기세다.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란 구분이 등장할 정도로 강한 경제력을 자랑했던 일본이 수출기업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왜 세계 경제질서에서 복권하지 못할까? 이코노미스트, 월스트리트저널(WSJ),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외신의 시각을 통해 일본 경제의 구조적 결함을 진단해본다.


 
중국 상인들은 상품을 팔 때 국적에 따라 세 가지 가격을 적용했다. 부유한 나라와 중국의 구매력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상품에 다른 값을 매긴 것. 일본인에게 가장 비싼 값을, 한국인에게 중간을, 중국인에게 싼 값을 물었다.
 
이같은 상황이 일본에서 재연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중고차 시장과 호텔업계에서 개발도상국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중(二重) 가격제가 성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구매력이 약해진 내국인들을 끌기 위한 방편인 셈이다.
 
일본 중고차 경매시장의 고위 관계자는 과거에 중고차 모델이 일본에서 500만엔에, 중동과 러시아에서 5만~10만엔에 팔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중동과 러시아에서 200만~300만엔에 팔리는 중고차 모델이 일본에서 100만엔에 판매된다. 
 
호텔업계도 외국인과 일본인을 차등하고 있다. 뉴 오타니 호텔은 외국인을 위한 6만~8만엔대 객실을 꾸민 반면에, 일본인을 위해 2만엔대 객실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인의 구매력이 약화된 이유는 ▲저성장 ▲엔화 약세 ▲디플레이션 등 삼중고 때문이다. 1980년대 말 미국의 상징적인 기업을 사들이고, 엄청난 규모로 외국 명품을 사재기 하면서 서양 일간지를 장식했던 일본인의 모습은 잊혀진지 오래다.  


미국기업을 사들일 정도로 부유했던 일본인이 왜 가난해졌을까? 부동산 거품이 꺼진 이후 시작된 장기 불황을 제일 먼저 탓할 수 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회생신호를 보였던 일본 경제가 쉽사리 본궤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10년도 지난 부동산 거품 붕괴에 있지 않다.  

바로 장기 불황이 초래한 비정규직 중심의 고용 구조에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비정규직 제도로 `일하는 극빈층`이 등장한 것. 
 
일본의 `종신고용` 사회가 비정규직 중심의 고용 구조로 이행한 것은 1990년대 말 일본 정부가 기업의 구조조정을 돕기 위해 고용법 규제를 완화하면서 시작됐다. 정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같은 특정 업종에만 비정규직을 허용했지만, 1999년 허용 범위를 확대해 지난 2004년에는 제조업까지 비정규직 고용을 허용했다.
 
일본 기업은 정부의 노동규제 완화 덕분에 인건비를 줄이면서 회생할 수 있었다. 일본 대기업은 5년 연속 실적 증가세를 기록했다.
 
그러나 정규직의 40%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들이 일본 근로자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일본 소비경제는 극도로 부진한 상태다.
 
 
일본 경제의 비정규직 의존도는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WSJ은 지적했다. 현재 일본 근로자의 3분의 2 정도가 일용직이다. 10년 전에는 23%, 20년 전에는 18%에 불과했다.
 
도요타 자동차와 협력사의 경우를 보면, 정규직은 29만명인데 반해 비정규직은 11만명이다. 캐논과 협력사가 고용한 비정규직 근로자수는 4만명으로 지난 2003년보다 4배로 늘었다. 반면 정규직은 12만7000명으로 같은 기간 동안 24% 증가했다. 



 

▲ 30년간 일본 소매판매액 추이. (단위: 조엔) 지난 1992년 부동산 거품이 빠질 즈음 정점을 친 뒤에 계속 감소세를 보여왔다. 특히 지난해부터 감소세가 심화됐다.



싼 임금은 양날의 검이다. 기업은 인건비를 줄일 수 있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기업의 고객도 가난해진다.
 
이 탓에 미국 경제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70%인 반면에 일본 경제에서 소비 비중은 절반을 조금 넘는다. 일본은행(BOJ)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저축을 전혀 하지 않은 일본 가정은 전체의 23%에 달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는 쉽사리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실적이 개선된 일본 기업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보다 정규직 신입사원을 뽑고 있는 대신 기존 비정규직은 평생 시간제 일자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다.
 
때를 잘못 만나 비정규직이 됐던 젊은 층이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상황. 불황기에 대학을 졸업한 일본인이 비정규직을 요구받으면서, 25세부터 34세까지 세대에서 비정규직 비중이 무려 26%에 달했다. 10년 전에는 14%에 불과했다. 
 
구마노 히데오 다이이치생명 연구소 이코노미스트는 "추세로서 일본 비정규직 근로자수는 계속 증가할 것"이라며 "일본 전체 경제의 성장에 근심거리가 된다"고 지적했다.



비정규직 제도가 일본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일본 경제는 내수시장보다 수출시장에 더 기대게 됐다.
 
WSJ은 일본의 높은 수출 의존도가 일본 경제를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미국 경제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로 경기후퇴 위기에 처한 지금, 회복세를 보이던 일본 경제가 주춤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일본처럼 비정규직 의존도가 높은 유럽도 비슷한 상황. 일본과 유럽은 약한 소비 탓에 중국과 다른 개발도상국의 경제 성장세에 의존하게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 노동 인력의 14%가 비정규직이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 장년층의 목소리를 빌려 일본 고용구조의 변화를 전했다. 일본 사회는 부동산 거품 붕괴로 종신고용제에서 비정규직제로 이행하면서, 근로 개념에서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이 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1945년 이후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남겨졌다. 그래서 우리는 (생존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한 팀으로 함께 일해야만 했다. 우리는 성공했고, 일본도 성장했다. 그러나 이 질서는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똑같은 상태로 너무 오래 있었다. 이 체제는 녹슬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중심의 유연한 고용체계도 과도기에만 요긴할 뿐, 일본 사회는 장기적으로 다시 새로운 고용구조를 세워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다. 한 일본인의 녹슬었다는 자조적인 평가는 비정규직 제도에도 적용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