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걸의 기업 구조조정 원칙 ‘가성비論’
by박종오 기자
2018.04.08 19:05:47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본지 인터뷰
국책銀, 비용 대비 사회적 편익 크면 '가성비 있는 투자'
"전통산업 구조조정 욕먹어도 할 것..기업 세대교체 필요"
|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이 지난달 19일 광주시 서구 치평동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금호타이어 경영 정상화 기자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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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박종오 기자] 저마다 기업 구조조정의 ‘원칙’을 말하지만 그 정의는 제각각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안된다고들 한다. 정부는 이해 관계자 고통 분담을 거쳐 독자 생존이 가능한 기업에만 돈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을 이끄는 이동걸 회장이 말하는 구조조정 원칙은 조금 다르다. 그의 원칙은 이른바 ‘가성비론(論)’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회장은 지난 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산업은행 본점에서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구조조정 원칙이 “정확히 가성비 이론”이라고 강조했다. 가성비는 가격 대비 성능을 말한다. 같은 가격이라도 성능이 뛰어나면 가성비가 좋다고 한다. 쉽게 말해 비용 대비 편익이 크다는 얘기다.
그는 “사기업이나 개별 투자자 등 일반인은 비용과 편익을 따질 때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만을 감안한다. 남이 이익을 보는 것은 중요치 않다”며 “하지만 정책 당국의 계산 방법은 좀 다르다. 지역 경제와 고용 등을 통해 돌아오는 이익까지 포함해 계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민간 은행이라면 부실기업에 돈 넣을 이유가 없다. 투자가 이윤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은행 같은 국책 금융기관의 역할은 다르다. 한국GM이 무너지면 본사와 협력사 일자리 15만6000개가 사라진다. 대규모 생산 공장이 문 닫고 협력 업체가 연쇄 도산하면 지역 경제도 위태로워진다. 산업은행이 한국GM을 대상으로 검토 중인 5000억원 규모 신규 투자는 그런 점에서 가성비 있는 선택이다. 비록 GM이 향후 공장을 철수하더라도 노동자와 협력 업체가 다른 생존의 길과 연착륙을 모색할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어서다. 이 회장은 “금호타이어든 한국GM이든 시중은행은 아무도 안 들어온다. 은행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되더라도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되면 지원한다. 국민 전체의 이익이 높다면 할 의미가 있다”고 했다.
물론 모든 투자가 가성비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옥석을 가려야 한다. 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적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중견 조선사인 STX조선해양의 채권단이 자율 협약(채권단 공동 관리)을 맺은 2013년 이후 지원한 돈은 총 7조9000억원에 이른다. 이 회장은 “그 돈을 차라리 노동자에게 직접 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은 사회 경제 전체적인 측면에서 수지가 안 맞았기 때문”이라며 “그런 식으로 지원하는 것이 바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언급했다.
산업은행이 STX조선에 고강도 자구 계획을 촉구하는 것도 지금 상태에서 신규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가성비가 낮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정책 당국의 재정 집행을 대리하는 금융기관 수장으로서 부실기업을 구조조정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회장은 “지난 9년간 두 정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문제를 모아서 우리한테 떠넘겼다”면서 “나는 내가 욕먹더라도 하는 데까지 해보려고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건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제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과거의 굴레를 끼고 앉아 있으면 안 되는 만큼 (부실기업을) 우리가 어느 정도 정상화시켜서 내보내야 한다”고 했다.
과거 한국 경제의 주축이었으나 지금은 경쟁력을 잃어가는 조선·자동차 등 중후장대 산업 구조조정에 팔을 걷어붙이겠다는 것이다. 오는 6월 일몰을 앞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을 좀 더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회장은 “(법정관리를 다루는) 파산법이 제대로 정비될 때까지 기촉법이 좀 더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 기촉법을 근거로 추진하는 채권단 중심의 워크아웃(기업 재무개선작업)이 국책 금융기관이 정치 논리로 부실기업에 혈세를 넣는 통로가 된다며 비판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전통 산업 재조정 그다음 순서는 신산업 육성이다. 이 회장은 “내 평소 소신이 기업의 세대교체”라며 “우리는 1970년대 주력 기업이 여전히 국가 경제를 이끌고 있다. 이게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페이스북·아마존·넷플릭스·구글 등 이른바 ‘팡(FANG)’이 미국 경제를 끌고 가는 것처럼 산업은행이 지원한 기업이 미국의 페이스북 같은 기업이 된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 회장은 “난 (구조조정을) 피할 생각이 없다”며 “(산업은행에) 출세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장관, 부총리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맡은 것을 충분히 하고 이후 학자로 돌아가 책을 쓸 생각”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