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린치, 고양이 목에 방울달다

by김윤경 기자
2008.07.30 14:00:26

메릴린치, 306억弗 CDO 론스타에 매각..장부가 1/5 가격
"잘했다" 찬사 vs. "비용 많이드는 극약처방" 비판
씨티 등 경쟁사 뒤따를 지 `주목`

[이데일리 김윤경기자] "빨리 손실을 털고 가자" "쓰레기는 빨리 치우자"

메릴린치가 지난 28일(현지시간) 85억달러 규모의 증자와 함께 자산담보부증권(CDO)을 매각키로 결정하자 긍정적인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메릴린치 주가는 물론, 신용위기에 짓눌렸던 뉴욕 증시도 환호하며 하루만에 반등했다.  
 
하지만  메릴린치의 결정에 대한 비판이나 우려도 적지 않다. 지금이 손실을 털어낼 적절한 시점인지, 너무 비용을 치르는 손실 털기가 아닌 지 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장부가 20% 밖에 안되는 가격에 부실을 털어내는 건 그야말로 극약처방.
 
메릴린치가 먼저 부실을 이렇게 현실화하고 나서면서 씨티그룹을 비롯, 다른 월가 투자은행들도 메릴린치의 뒤를 따를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다. 메릴린치로선 감추고 싶었던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며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셈이다.
 
당장은 막대한 손실이 날 수 있겠지만 서브프라임 손실은 털어내 버리는 `거대한 청소`가 개시되느냐, 아니면 이런 `극약 처방`을 좀 미루느냐가 당분간 월가의 화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메릴린치는 장부가액 306억달러 규모의 CDO를 5분의1 수준인 67억달러에 론스타 펀드에 매각했다고 밝혔다. 또 기존 주주인 테마섹 홀딩스 등을 대상으로 증자를 실시, 85억달러를 조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월스트리트저널은 메릴린치의 CDO 매각을 `집청소(homecleaning)`에 비유했다
메릴린치는 이와 함께 시큐리티 캐피탈 어슈어런스(SCA)와 37억4000만달러 규모 CDO와 연계해 맺은 파생 계약도 해지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메릴린치의 결정에 대해 일단은 찬사가 많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는 메릴린치의 CDO 매각이 "금융권의 CDO 관련 리스크가 막바지(endgame)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BOA의 제프리 로젠버그 애널리스트는 "이번 매각은 미국 증권사, 은행, 채권보증업체 등 금융권의 불확실성을 줄였다"며 "장부가치 이하의 헐값 매각은 당장 손실을 초래했지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확실히 감소시켰다"고 진단했다.

신용평가사 스탠다드 앤드 푸어스(S&P)도 "메릴린치가 다른 CDO를 비롯해 주택 및 상업용 모기지와 모기지증권(MBS)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번 거래로 인해 추가적인 대규모 상각의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들었다"고 분석했다.



도이체방크의 마이크 마요 애널리스트도 "단순히 자산을 상각한 것이 아니라 매각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뉴스"라고 평가했다.

JP모간 체이스의 집계에 따르면 메릴린치는 올들어 지금까지 CDO 규모를 지난해 8700억달러에서 890억달러로 줄였다. 
 
 
하지만 지금이 CDO를 매각하고 부실을 털어내고 가기에 적절한 시점이 아니며, CDO 매각 가격도 너무 낮아 오히려 손실 규모를 불릴 것이란 지적도 쏟아지고 있다.
 
퓨전 IQ의 리서치부문 디렉터 배리 리톨츠는 29일 이메일을 통해 "헹구고, 비누 거품을 칠하고, 또 그걸 반복한다(Rinse, lather and repeat)"라고 지적했다.  
▲ 존 테인 메릴린치 CEO

존 테인 메릴린치 최고경영자(CEO)가 실적과 실적 전망을 발표한 뒤, 몇 주 후엔 또 다시 전망치를 낮출 것이고, 또 그 몇 주 뒤 더 많은 자산을 상각하고, 또 다시 더 많은 자본을 조달하고 하는 일이 다음 분기에 반복될 것이라는 얘기.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자본 사정이 좋다고 계속 말해 온 메릴린치가 왜 지금 CDO 매각에 나서는 지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존 테인 CEO는 지난해 12월 영입된 이후 47일만에 가진 인터뷰에서 "메릴린치의 모기지 증권 보유 문제는 상당부분 해소됐다"고 공언했고, 이후 7개월여 기간 동안 늘 이런 말을 반복해 왔다.   

지난 17일 2분기 실적을 발표할 당시에도 메릴린치는 블룸버그 지분 20%를 팔아 45억 달러 가량을 마련한다고 함께 밝혔다. 또 28일 증자 발표 전까지 보통주와 우선주 발행 등을 통해 150억달러 이상을 조달해 놓은 상태다.
 
테인 CEO는 그 날 컨퍼런스 콜에서 '우리의 자본 상태에 대해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쨌든 메릴린치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았다. 부실의 핵심이랄 수 있는 CDO 매각에 먼저 나섬으로써, 이 CDO의 가치가 산정되면서 손실이 현실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당장은 손실 증가가 불가피하다. 증권사들도 일제히 메릴린치에 대한 실적 전망치 수정에 나서고 있다. 
▲ 월가 투자은행들 주가..BOA-씨티그룹-메릴린치


`월가의 족집게` 오펜하이머 &Co.의 메리디스 휘트니는 일단 메릴린치의 행보에 찬사를 보내면서, 올해 주당 10.50달러의 손실을 낼 것이라고 전망치를 수정했다. 기존엔 주당 8.37달러 손실을 예상했다.
 
크레디트 스위스(CS)는 "메릴린치가 상당히 모기지 증권 CDO를 줄이게 됐지만, 비싼 가격을 치러야 해서 주가는 내릴 수 있다"면서 실적 전망치를 80%나 하향 조정했다.  

메릴린치가 매각한 CDO는 시니어(Senior)와 메자닌(Mezzanine)으로 등급도 높은 것이지만 헐값에 팔렸고, 따라서 이건 너무 강력한 약 처방이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WSJ은 "CDO 매각이 메릴린치 주주들의 리스크를 모두 해소해 주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나머지 CDO 가격은 더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경쟁사들이 메릴린치의 뒤를 따를 경우 극약 처방에 따른 부담이 막대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다음 나설 수 있는 타자로는 씨티그룹이 지목된다.
 
도이체방크의 마요 애널리스트는 씨티가 3분기 80억달러의 자산을 상각할 것이며,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씨티의 신규 자금 조달 결정이 빠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씨티는 지난 분기까지 약 280억달러의 CDO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ABS 기반의 CDO는 약 14억달러 어치로, 가치는 주당 약 62센트다.
 
그러나 모간스탠리의 애널리스트 베스티 그라섹은 씨티가 이 가치를 추가로 21% 더 낮춰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110억 달러 규모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기반의 CDO를 갖고 있는 BOA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51억달러 규모의 또 다른 자산 기반의 CDO도 있다. BOA는 CDO 가치를 주당 35센트로 보고 있다. 주당 22센트의 메릴린치 보다는 사정이 조금은 낫지만 `그게 그 것`이다.
 
유럽에선 UBS, 스코틀랜드 왕립은행(RBS), 바클레이즈 등도 보유 CDO가 많은 곳들이다. 채권 보증사들 역시 들고 있는 CDO가 적잖다. 이들은 메릴린치의 CDO 매각에 따라 적정 가격을 따져보느라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