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문주용 기자
2003.09.03 11:30:00
[edaily 문주용기자] "가신 이의 한달이 남은 자들에겐 10년 같을까…" 정몽헌 현대회장이 사망한지 4일로 꼭 한달째다. 불과 한달 밖에 안됐지만 그의 사망은 빅뱅처럼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한꺼번에 격발시켰다.
이토록 순식간에, 여러곳에서, 다양한 반응이 터져나왔다는 것은 그의 빈자리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현대를 둘러싼 많은 정치, 경제적 관계를 그가 자신의 무게로 눌러왔고, 그의 부재로 이제사 사건들이 해방되어 나오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
한달사이 정치적으로는 "현대비자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의 사망을 둘러싼 DJ 정권과 현정권의 반응은 차라리 사소하다. 기다리기라도 한듯 북한이 금강산 관광을 중단한 것도 눈에 띄는 정치적 사건중 하나다. 이로 인해 현대의 대북사업 지속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경제이슈로는 뭐니해도 현대의 경영권 혼란이다. 외국인들이 지배구조상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11%까지 매입, 현대그룹 경영권을 흔들어놓았다. 이에 맞서 현대 위성그룹인 금강고려화학(KCC)그룹이 지원에 나서면서 현대 경영권은 마치 부유하는 난파선이 물마루 꼭대기에 올라서듯 위태로운 정점을 맞았다. 결말은 정 회장의 처가 일가가 현대그룹 경영에 서서히 발을 들여놓는 형국으로 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현대종합상사가 지난 9월1일자로 그룹에서 계열분리돼 그룹은 더욱 작아졌다.
◇정회장, 판도라의 뚜껑을 닫으려했나, 열려했나
정 회장의 사망과 관련, 최측근인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그가 모든 것을 떠안고 갔다"며 오열했다가 눈물이 마른 후엔 딱 잡아뗐다. 뉘앙스상 정 회장이 현대 비자금이라는 판도라 상자를 덮으려 했다는 것.
하지만 마지막 거부의 몸짓과는 아랑곳없이 검찰은 정 회장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급피치를 밟기 시작, 대어중에 대어인 권노갑씨를 구속하는데 성공했다.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제공한 150억원외에 권씨에 200억원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어 이 돈을 권씨로부터 받은 정치인 수명에 대해서도 조사중이다.
정 회장은 비자금 수사를 끝내고자 자살로서 입을 다물었지만 결과는 오히려 검찰의 수사본능을 더 자극한 셈이 됐다. 죽음으로도 마무리 지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오히려 그에게 외로운 선택을 강요했는지 모를 일이다.
◇믿었던 북한, 아직도 믿을 수 있나
금강산 관광사업이 차질 없길 바랬던 정 회장의 유지와 달리 북한은 정 회장을 추모하기 위해 금강산 관광을 중단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북한의 속뜻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대체로 정 회장의 사망이라는 중대한 변수가 발생하자 북측은 남북경협을 비롯한 남북현안에 대한 우리정부의 입장을 시험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회장 사망이 우리정부에 대한 "테스트 베드"가 된 셈이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사업을 차질없는 진행을 요구한 현대아산의 요구를 거부하다 결국 9월 1일자로 재개하는데 합의했다. 또 해로 관광위주에서 벗어나 육로관광이 추가되고 외국 관광객이 늘고 국내 여론도 좋아지는 등 다시 활기를 찾고 있어 비온 뒤 땅이 굳는 느낌이다.
특히 `4대 남북경협합의서"가 발효되면서 현대아산은 북측 투자시설이나 사업권에 대해 자산으로 확실히 인정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북한은 정 회장이 없는 현대아산에는 강한 애착이 없는 듯 보인다. 당장 평화항공에 평양관광 사업권 허가를 주는 등 대북사업에 대한 현대측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때문에 정 회장이 없는 현대가 대북 사업을 속행하는 것은 어려울 전망이다. 정부가 직접 나서는 방안, 다른 기업들이 참여하는 방안등이 현실적 대안으로 얘기된다. 김윤규 사장도 북한 방문후 부쩍 정부 지원과 현대아산의 국민주 공모에 집착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정 회장의 빈자리를 누가, 어떤 식으로 채우느냐가 계속 수행할 수 있을지의 관건이다.
◇스타가 된 측근들, 구조조정 칼날도 피할수 있나
정 회장이 먼저 이승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믿을 만한 측근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유서를 통해 김윤규 사장은 스타가 됐다. 최근에는 "김윤규를 사랑하는 모임"까지 생겼을 정도다.
사실 정 회장의 달아나던 복(福)중에 "전문경영인 복"은 완전히 달아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김윤규 사장이나 강명구 현대택배회장, 김재수 구조정본부장(사장)에 해당되는 얘기가 아닌 듯싶다. 현대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현대상선(11200)의 노정익 사장, 지배구조상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17800)터의 최용묵 사장, 금융사업의 꿈을 지킬 현대증권(03450)의 조규욱 부회장등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이들은 현대그룹의 진짜 전문경영인으로서, 그리고 젊다는 장점을 바탕으로 현대를 지켜낼 인물들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경영인, 소위 측근이라는 사람들은 그룹 OB, YB들로부터 원성의 타깃이다. 김윤규 사장은 정 회장으로부터 "자식조차 부끄럽게 한 인물"로 칭송받았고 스스로 정씨로 성을 바꿔야 할 판이라며 정 회장에게서 입은 은혜에 화답했지만 냉정한 시선은 그에게도 상당한 책임을 지우고 있다.
이와 함께 강명구 회장, 김재수 사장등은 같은 이유에서나 그보다 가벼운 이유로도 "보필을 잘못한 책임"을 현대가(家) 사람들로부터 요구받고 있다.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현대 경영권 지원과 관련, 회장급 전문경영인을 앉히고 경영진을 정리해야 한다고 밝혔다는 소문은 이들을 염두한 것으로 보인다.
꼭 책임을 묻지는 않더라도 현대가 몸을 추스르고, 새롭게 시작하려면 새로운 주도적 리더십 세력을 확립하는 일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 누구 앞에 다시 설 것인가
정 회장 유족들의 눈이 젖어있을 동안 그 젖은 눈을 응시하던 외국인들의 냉정한 눈이 있엇다. 그리고 그들은 행동에 나섰다. 특히 지난 11일부터 불과 2,3일만에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집중 매입, "M&A 사냥"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7%이상의 지분을 매입한 미국의 GMO펀드가 주도한 움직임이었다. 현대가 위성그룹의 협조를 받아 의결권을 늘리는 방법으로 이들에 맞서, M&A 방어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때 국내 최대 그룹이었고, 리더를 잃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현대를 공격했던 자본의 논리는 냉혹함 자체였다.
경영권 방어에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의 막내동생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나섬으로써 상황은 다시한번 급변했다. 한때 "현대그룹 섭정"으로까지 해석됐다가 가라앉았지만 이는 정 회장의 처가를 현대그룹 경영전선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된 것.
정 회장 장모로 현대엘리베이터 최대주주인 김문희씨가 최근 필요할 경우 현대그룹 경영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을 비쳤다. 또 자신의 딸이자 정 회장의 미망인인 현정은 씨가 정상영 명예회장의 조언을 받고 있다며 소개, 현씨 일가의 섭정을 가시화하고 있다.
현대가의 법통이 현대차그룹으로 넘어간 마당에, 현씨 일가의 그룹 섭정은 상징성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듯하다.
현씨 일가는 아직 어린 정 회장의 아들 영선(17)군이 성인이 되기까진 현대그룹을 경영할 가능성이 크다. 기업경영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현정은씨는 한달만에 재계 15위에 계열사수만 11개에 이르는 현대그룹의 조종타를 인계받아야 할 막중한 위치가 됐다.
현대가 현정은씨를 중심으로 젊은 경영인들을 중용하고, 각 계열사간 독립경영 원칙을 제대로 유지한다면 최악의 상황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전망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변신은 "환영"할 만하다. 어쨌든 그들은 살아있는 신화의 주인공, 현대맨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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