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이종석 기자
2005.05.19 12:40:40
70년대 한강의 기적 이룬 "대동맥"
[edaily 이종석기자] 경부고속도로는 여러 면에서 놀랄만한 기록들을 세웠다. 2년5개월이라는 짧은 공사기간을 통해 총연장 428Km에 달하는 고속도로를 순전히 우리 자본과 기술로 건설했다. 건설비용으로는 총 428억원이 소요돼 Km당 1억원이라는 경이적인 비용으로 공사를 마쳤다.
IBRD는 당시 보고서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선진국 수준으로 건설하려 했다면 Km당 5억원, 최소 2140억원의 자금이 소요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선진국의 5분의 1 비용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었던 데는 “선개통-후보완” 원칙이 크게 작용했다.
박 대통령은 “가난한 살림에 처음부터 선진국 수준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우선 개통시켜 이용하면서 통행료 수입내에서 보완해 나가자”며 선개통-후보완 원칙을 제시했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 산정의 논리적 토대가 되었다.
◇ “안되면 되게 하라”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박 대통령의 밀어부치기 사례는 공기단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2년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428Km 대동맥을 뚫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되면서 기록적인 공기를 기록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첫 구간인 서울-수원간 공사로, 일체의 행정절차를 무시한 사전공사로 진행됐다. 정상적인 절차를 따른다면 경제기획원에서 각 부별 예산이 배정되고 이 예산이 부처별로 재배정되어야 비로소 건설부 고속도로 건설단에 예산이 확보된다. 이후 재무부 국고국에서 사업발주 승인을 받아 조달청으로 서류가 넘어가면 발주가 공고되고 건설업체들의 입찰-심사-낙찰 과정을 거쳐 선발된 업체와 계약을 체결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행정절차를 준수했다면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공사는 5개월여 이상 지체됐을 것이고, ‘2년5개월 완공’이라는 공기목표 달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최종성 당시 건설부 차관(8대 국회의원 역임)의 회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2차5개년계획 연도안에 완성되어야만 했습니다. 3차 5개년계획 때 이 도로를 이용해 새로운 경제계획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지요. 박 대통령이 원하던 기간내에 공사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임무가 건설부 및 현장 직원들의 가슴속에 사명감처럼 와 닿아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밀어부치기는 국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법안 날치기 통과도 감행됐다.
68년 2월28일. 고속도로 건설재원으로 사용될 석유류법 개정안이 회기를 하루 남기고 국회에 제출됐다. 고속도로 건설비용 마련을 위해 휘발유 값을 100% 인상하는 내용이었다. 법률안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 경부고속도로 건설 작업이 상당기간 지연될 수 밖에 없는 만큼 여당 입장에서는 반드시 법안을 통과시켜야 할 상황이었다..
회기 마지막날인 2월29일 오후 4시40분 석유류세법개정안과 도로정비촉진에 관한 법 개정안이 본회의에 상정됐다. 그러나 당시 여야간 쟁점이었던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둘러싸고 본회의는 파행을 거듭했고, 국회의장은 결국 6시40분 정회를 선언해 버렸다. 회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5시간 남짓.
다급해진 여당 수뇌부는 한밤중에 청와대로 집결한다. 밤 10시30분 김종필 당의장, 길재호 사무총장, 김진만 원내총무, 이만섭 부총무 등이 박 대통령과 마주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나라 경제 살리겠다고 고속도로 만들겠다는데…야당이 반대한다고 그걸 하나 통과 못 시켜?” 참석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통령에게 질책을 받은 여당 수뇌부는 회기 종료 40분을 남긴 밤 11시20분 국회로 돌아왔고 결국 날치기 통과를 감행한다. 여야 의원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장형순 국회부의장이 의사봉 대신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며 본회의 속개를 선언하고 두개 법안을 일괄 통과시켰다. 회기 종료를 불과 5분 남겨놓고 이뤄진 날치기였다.
이만섭 당시 공화당 부총무의 회고.
“대통령에게 혼쭐이 나고는 허겁지겁 청와대를 빠져 나왔습니다. 제가 김진만 총무에게 “이거 합시다. 해야지 어쩝니까”라고 말했지요. 이때부터 국회에 돌아와 단상 점거하고 법안을 통과시킬 때까지 불과 30분도 채 안 걸렸을 겁니다. 사람이 한번 혼이 나고 나니깐 전부 달라집디다”(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박정희 작사 작곡 지휘…신화의 탄생”
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가 마침내 완전 개통됐다. 긴 교량 32개와 짧은 교량 328개를 건설하고 터널 12개를 뚫는 민족의 대역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공사에 투입된 연 인원만 해도 900만명에 달했다.
이날 대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기념식에서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체이자 민족적인 대예술작품”이라며 건설 참여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이 가져온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국가 전 부분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국토의 1일 생활권화가 가능해졌으며, 인적 물적 자원의 지역간 이동이 원활해지고 대도시 집중이 가속화되는 등 새로운 사회현상들이 나타났다. 경제적으로는 교통수송 및 유통구조가 급속히 개선되면서 그 자체로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경부고속도로는 사방에 막혀 있던 산맥들을 뚫으면서 말 그대로 “조극 근대화의 길”로 부상했다.
국민 각자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보고 경제 및 생활상의 여러 변화들을 체험하게 되면서 초기 고속도로 건설에 쏟아졌던 비난은 사라지고 어느새 "지지"와 "격찬"으로 바뀌었다.
만일 당시 국민적 반대 여론에 굴복해 정부가 고속도로 건설을 미루거나 늦췄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아마도 한강의 기적은 20년 이상 지연됐거나 아예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그때 박 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이라는 비범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교통수송상의 애로 때문에 60~70년대의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도 비슷한 평가를 내린다.
“경부고속도로는 시종일관 대통령이 직접 일궈낸 업적 중의 업적, 대작품입니다. 결코 주무부처나 내각의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지도자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각도에서 엇갈린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가 불도적식으로 밀어부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한국 경제개발의 주춧돌이 되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혈맥"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온갖 반대와 장애요인을 무릅쓰고 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한 박정희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대통령 스스로가 철두철미하게 무장된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국가의 회장(CEO)으로서 사업을 진두지휘하면서 직접 기획하고 실천에 옮겨 만들어낸 성과물이었다.
`한국도로공사 15년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고속도로를 하나의 거대한 합창이나 교향악에 비유한다면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 작사, 작곡, 지휘로 이루어진 불멸의 걸작품이다.” 고속도로와 박정희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압축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국경제 반세기"는 매주 화, 목요일 게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