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사 80%가 5인 미만...K뷰티처럼 기획, 생산 묶어 체급 키워야

by김정유 기자
2026.04.23 05:50:03

[제조혁신 시급한 K패션]②
패턴·봉제·후가공 등 공정 파편화
염색 하나만 틀어져도 생산 지연
빠르게 바뀌는 트렌드 대응 못해
수출물량 감당할 설비 인력도 부족
정부 전문기업 육성 정책 서둘러야

[이데일리 김정유 기자] 재봉틀 소리가 가득한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소재 의류제조업체 ‘비에파’. ‘비에파 팩토리’라고 명칭이 붙여진 사무실형 공장 안으로 들어서니 숙련자로 보이는 근로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의류 재단과 봉제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셀(자기완결형 작업단위) 방식인 이곳의 작업은 유기적으로 진행되는 모습이었다.

비에파 팩토리가 의류 ‘생산’에 초점이 맞춰진 곳이라면, 아래층에 있는 ‘비에파 랩’은 ‘개발’을 강조하는 공간이었다. 의류 생산의 ‘설계도’인 ‘패턴’을 짜는 패턴실은 물론, 샘플실 및 디자인 등 전반적인 의류 제조공정의 앞단에 해당하는 기획 작업들을 진행한다.

서울 동대문과 창신동 중심으로 영세업체들이 공정별로 산재된 국내 의류 제조생태계 안에선 ‘특이’한 사례다. 비에파가 최근 패션업계에서 기획형 생산(ODM) 중심 ‘차세대 제조모델’로 불리는 이유다. 자체 브랜드(EAAH)까지 보유하고 있는 비에파는 지난해 매출액이 100억원 수준이다. 국내 의류제조 측면에서는 최대 규모에 속한다. 송지오옴므, 킨록, 코오롱 래코드 등의 브랜드 생산을 맡아왔다.

국내 패션(K패션)업계에서 ‘제조혁신’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K문화 확산에 힘입어 K패션 역시 글로벌화 초입단계에 왔지만, 열악한 제조 인프라로 도약의 기회를 놓칠 것이란 우려에서다. 현재 국내 소재 의류제조업체들은 기획·패턴·샘플·봉제 등 생산기능이 모두 분산돼 있는 상태인데, 이 경우 고부가·다품목·신속 생산 대응이 어렵고 업체 규모도 영세해 수출 물량도 한계가 있다. 이에 지금이라도 기획 역량을 키운 통합 의류 제조 생태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글로벌 골든타임을 놓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가산디지털단지 소재 의류제조업체 비에파 봉제 근로자들이 작업에 나서고 있다. (사진=김정유 기자)


22일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소재 의류제조업체 가운데 5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의 81.3%에 달했다. 연간 매출액도 3억원 미만인 업체들이 82.1%를 차지했는데, 이중에서도 1억원 미만인 업체들은 60.3%나 됐다. 공정별로는 임가공 업체들이 전체의 89.8% 였는데, 이들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2.1%에 불과했다. 전반적으로 국내 의류제조생태계는 영세하고 열악한 상황이다.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마뗑킴’·‘마리떼프랑소와저버’·‘마르디메르크디’ 등 일부 브랜드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플랫폼 무신사를 통해 중소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중국, 일본 등에 진출하는 등 K패션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상황과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K패션 브랜드·플랫폼은 앞으로 나가고 있는 반면, 또 다른 축인 ‘제조’는 30~40년 전처럼 열악한 상태에 그치고 있는 건 생태계 측면에서 ‘불균형적’이란 지적이 나온다.

물론 국내 패션 제조업계에도 대기업들은 존재한다. 한세실업(105630), 세아상역, 영원무역(111770)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해외 생산 기반인데다, 물량 수주 단위도 대규모인지라 중소 디자이너 브랜드는 주문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A제조업체 관계자는 “1970년대 국가적인 섬유 수출 장려 차원에서 기업들이 베트남 등 해외로 나가면서 대규모 물량과 저가 수주 중심 운영으로 시스템화됐고, 국내에 남은 영세한 업체들이 중소 브랜드들만 상대하게 된 것”이라며 “서울 창신동, 동대문 일대 2~3명씩 근무하는 공장들”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의류제조생태계는 패턴·샘플·원단소싱·봉제·후가공 등 공정단계별로 생산 기능이 쪼개져 있다. 예컨대 봉제만 하는 2~3명이 근무하는 공장, 샘플만 만드는 공장 같은 식이다. 때문에 수십년이 지나도 업체들의 규모는 5인 미만 영세한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고, 공정 전반을 통합해서 진행하는 곳도 생기지 못했다. 과거엔 K패션 브랜드가 작은 내수에만 국한됐던 만큼,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한몫을 했다.



각 생산 기능별로 흩어져 있는 타 의류제조업체들과 달리 비에파 안에선 패턴과 샘플 작업까지 아우른다. 사진은 패턴실 모습. (사진=김정유 기자)


하지만 최근 K패션의 글로벌 진출 잠재력이 인정을 받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K뷰티의 성공처럼 ‘인디 브랜드’들이 대거 나와줘야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는데, K패션의 경우 국내 제조인프라가 받쳐주지 못하면 유망한 디자이너 브랜드 자체가 성장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규모를 키우면서 공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통합할 수 있는, 이른바 기획형 생산 역량을 갖춘 국내 소재 ‘제조전문업체’ 육성이 필요하단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B패션 브랜드 관계자도 “기획형 생산 역량을 갖고 통합 제조를 이끌 수 있는 체계가 중요하다”며 “예컨대 공장에 주문을 넣은 후 어느 한 공정(염색 불량 등)에서 문제가 나오면 해당 공정을 한 업체들을 일일히 찾아가 수정해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패션은 언제 출시하고, 언제 판매가 되는지 ‘시간’이 매우 중요한 만큼 꽤 리스크가 큰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최근 미국내 2030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지속가능 패션 브랜드 ‘리포메이션’도 자국내 기획형 의류 인프라를 기반으로 성공한 경우로 꼽힌다. 200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빈티지 매장에서 시작한 리포메이션은 사업 초기 LA 인근 공장에서 의류를 생산했다.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인근 의류제조공장의 기획 역량과 짧은 리드타임(주문부터 결과물이 전달되는 시간)으로 소량·다품종·빠른 재주문(리오더)이 가능했고, 클리어런스 세일(재고를 줄이는 할인)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이제는 유럽과 아시아까지 진출하며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성장했다. 자국내 기획 생산 역량을 가진 제조인프라가 초기 패션 브랜드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려주는 사례다.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기본 티셔츠 같은 제품들은 대량으로 맡기면 되지만, 유행을 타는 상품들은 시장 반응을 보고 빨리 재주문을 해야하기 때문에 자국 기반 제조 인프라가 중요하다”며 “무조건 편하고 싸다고 해외 생산만 할 수 없는 게 패션시장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정부에서도 이 같은 K패션의 위기의식을 인지하고, 전문기업 육성과 관련한 정책 검토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K패션의 글로벌 확장 잠재성이 큰만큼 정책적 뒷받침으로 ‘제2의 K뷰티’를 키우겠다는 복안이다.

조성경 산업부 섬유탄소나노과장은 “패턴부터 생산 및 디자인 제안까지 할 수 있는, 규모가 있는 체제로 국내 의류 제조생태계를 육성하는 부분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며 “그동안에는 관련 정책이 없었지만 내년도 사업으로 K패션 제조생태계의 질을 키울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있는 단계”라고 말했다.

성래은 한국패션협회장은 “기획과 개발, 생산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K패션의 품질과 속도,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며 “다품목 신속반응 생산이 가능한 패턴·샘플사 등을 중심으로 한 차세대 기술인재 육성과 기획형 생산 기반 제조기업의 성장 환경 조성이 병행되면 K패션은 글로벌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