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노역' 물타기 시도하는 일본의 속내

by장영은 기자
2015.07.14 10:39:13

日 외무장관 이어 총리까지 ''강제노역'' 부정 시도 이어가
보통국가화·전후 배상문제 등 日 이해관계 얽혀 있어
정부, 한일 관계 고려 적극적으로 대응 나서지 않는 듯

[이데일리 장영은 기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된 일본 근대산업시설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제시대 조선인 ‘강제노역’을 명기하는 선에서 한일 양국이 등재에 합의했지만, 등재 발표 직후부터 일본 정부에서 강제노역을 부정하는 취지의 주장이 잇따르면서 국내외 비판여론이 들끓고 있다.

등재 결정 직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은 기자들에게 “(등재 결정문에 반영된) ‘forced to work’라는 표현은 강제 노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재외공관 등을 통해 이 표현이 강제노동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국제사회에도 홍보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 10일에는 행정부 수반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 때 일본 정부 대표 성명에 있었던 ‘forced to work’라는 문구는 대상자의 의사에 반해 징용된 경우도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고 말하는 등 ‘물타기’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이 강제노역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나서는 이유는 두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먼저 아베 정부의 ‘보통국가화’ 전략의 연장선이다. 2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국가(전범국)라는 멍에를 벗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고자 하는 아베 내각이 역사적 과오를 부정하고 미화시키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2009년부터 이들 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치밀하게 준비한 점, 아베 총리가 등재 과정을 진두지휘한 점, 일본 제국 침략주의의 산실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등재 목록에 포함된 점도 여기에 힘을 보태준다.



두번째 이유는 강제노역 인정이 전후 배상문제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문제를 주로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 여부라는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는 국내 여론과는 사뭇 다른 측면이다.

강제노역 피해자들은 현재까지도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 법원이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은 소멸됐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일본에선 줄줄이 패소했지만, 국내 법원에서 소송이 진행중이다.

지난 2012년 우리나라 대법원이 강제노역과 관련해 한일 청구권 협정과는 별개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린 이후 피해자들은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잇따라 제기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일본이 국제법상으로 위법성을 가진 ‘강제노역’을 스스로 인정할 경우 현재 진행 중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측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며 “일본으로서는 이를인정하면 지금까지 주장했던 전후 배상 체계를 뒤엎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의 강제노역 인정에 대해 상당한 외교적 성과라며 높이 평가했던 정부는 오히려 이번 일을 크게 확대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최근 열린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영문본이 정본”이라며 “영문본에 충실하면 오해가 없고, 논란의 소지도 없다”고 강조했다.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도 “이번에 국제사회가 받아준 것은 영문본”이라며 “일본이 자국 내에서 해석한 것을 갖고 우리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외교부는 지난 7일부터 외교부 홈페이지에 팝업창을 통해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에 ‘의사에 반하여 강제로 노역한 역사’를 반영했다”고 홍보하는 등 소극적인 대응에 그치고 있다.

이는 지난달 한일 수교 50주년 기념행사에 양국 정상이 교차 방문해 관계 개선의 기회를 마련한 만큼, 이번 갈등이 확대되면서 양국 관계가 다시 냉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