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하정민 기자
2006.05.08 13:32:03
[뉴욕=이데일리 하정민특파원] 한 좁은 호텔 방에 4명의 아랍인들이 있다. 작은 목소리로 코란을 읽고 메카를 향해 절하던 그들은 "때가 됐다(It's time)"고 말하며 공항으로 떠난다.
그리고 2001년 9월11일 오전 8시50분. 여객기 한 대가 뉴욕 월가에 자리한 110층 짜리 세계무역센터 건물 상단에 충돌한다. 다시 20분 후 다른 여객기가 두 번째 건물과 충돌한다.
그 시간 뉴저지 뉴왁 공항에서는 유나이티드 에어 93편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승무원들은 평소처럼 커피를 마시며 날씨를 점검하고, 탑승자들은 여유롭게 비행기에 오른다. 허드슨 강 건너편의 맨해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이들은 몇 분 후에 자신들에게 어떤 운명이 닥칠 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다.
`유나이티드 93`은 911 테러범들이 납치했던 네 대의 비행기 중 하나다.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미국 국방성이 공격을 받는 사이 샌프란시스코를 향하던 `유나이티드 93` 비행기는 워싱턴 충돌을 목표로 하는 테러범들에 의해 공중납치된다. 그러나 승객들의 거센 저항 끝에 비행기는 펜실베니아 주 서머싯 카운티의 벌판에 추락하고 탑승자 전원은 사망한다.
이 비극적 이야기를 재구성한 `유나이티드 93`은 당시 비행기 안에서 벌어졌던 테러범들의 납치 과정과 승객들의 사투를 생생하게 재연하고 있다. 이 영화는 제작 단계부터 많은 논란에 휩싸였고 많은 사람들은 개봉을 반대하기도 했다. 911이 일어난 지 몇 년 되지도 않아 이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너무 이르며, 엄청난 비극마저 상업적 소재로 사용하려는 할리웃의 의도가 불경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는 이런 논란이 기우였음을 알려준다. `유나이티드 93`은 비극을 정면으로 돌파하지만,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고 어떤 해답이나 결론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꼼꼼하고 세밀하게 사건의 진행 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도 결과적으로 더 크고 묵직한 울림을 관객들에게 남긴다. 영화를 보는 누구나 이 사건의 결말이 어떤 지 알면서도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기원하게 되고, 마지막 암전 장면에서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폴 그린그래스는 아일랜드의 비극적 역사 `피의 일요일`을 다룬 `블러디 선데이`를 통해 다큐멘터리적 영화에 대한 자신의 능력을 세계에 알렸다.
재능을 인정받아 할리웃에 입성한 그는 맷 데이먼이라는 스타를 데리고 찍은 블록버스터 `본 수프리머시`에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았다.
폴 그린그래스는 `유나이티드 93`에서도 특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충실히 재현해내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모두가 실존 인물인 승객 역할에 스타 배우 하나 캐스팅하지 않았다. 미국 언론의 과도한 관심을 피해 영국 스튜디오에서 작업했고 대부분의 영화 속 대사들도 그가 즉흥적으로 만들어냈다. 완성도 높은 영화를 본 희생자 유족들은 "오히려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며 만족을 표했고, 비평가들도 "모두가 봐야할 영화"라는 찬사 일색의 평을 내놨다.
`유나이티드 93`의 조종실 테입은 지난 주 911 테러 공모 혐의로 미국에서 유일하게 기소된 모로코계 프랑스인 자카리아스 무사위의 재판 과정에서도 등장해 높은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지난 4년간 진행된 무사위 재판은 사형 선고 논란과 재판 과정에서 무사위가 행한 충격적인 증언으로 뜨거운 논쟁을 야기했다. 무사위는 "후회도, 양심의 가책도 없으며 매일 911 테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등의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내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911이 발생한 지 벌써 5년이 돼 가지만 굳이 무사위 재판이 아니더라도 테러의 충격은 여전히 미국 사회와 미국인의 의식구조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물론 미국 정부는 911이 일어난 원인을 규명하고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냉전 논리로 이를 해결하고자 했고, 이라크 전쟁이란 결과물을 낳았다.
때문에 911은 싫든좋든 미국 내에서도 미국 밖에서도 영원히 현재진행형일 수 밖에 없는 사건이다. 911 테러, 나아가 인간 존엄과 세계 평화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가지고 싶다면 꼭 봐야할 영화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