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40년)②"고급차로 해외시장 재도약"

by정재웅 기자
2007.12.20 11:10:10

북미시장 좌절에서 시작한 현대차의 품질혁신
현대차 품질혁신의 결정판 '제네시스' 렉서스 신화 재연한다

[이데일리 정재웅기자] “선진국이 후진국과 합작사업을 하면 거의 예외없이 그 후진국을 단순한 시장으로 간주한다. 나는 처음부터 국제경쟁력을 갖춘 고유모델 자동차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말이다. 정 명예회장은 일제 치하 자동차정비소 수리공 시절부터 자동차 부국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그는 자동차공장을 짓더라도 협소한 내수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시장으로 진출해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현대건설이 1967년 12월21일 정부에 제출한 자동차회사 설립 신청서에도 ‘수입대체 산업으로 국가 경제발전에 공헌할 뿐만 아니라 장차 우리나라 경제를 선도할 수출 전략 산업으로 적극 육성하겠다’고 적혀있다. 고유모델을 만들어 세계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976년 7월. 마침내 현대차의 첫 고유모델인 포니 7대가 남미 에콰도르로 수출됐다. 이는 현대차가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자, 정 명예회장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부는 1977년 11월 자동차를 수출전략산업으로 선정했고 현대차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수출역군으로서 큰 활약을 펼쳐왔다.



현대차(005380)는 첫 수출을 시작한지 20년만인 1996년 11월 누적 수출 400만대를 돌파했다. 30년이 지난 2006년엔 한 해동안만 103만대를 해외에 수출했다. 중국, 인도, 미국, 터키 등 해외공장 생산판매분을 합칠 경우 2006년동안 해외에서 판매된 현대차는 190만대를 넘어선다.



▲ 1986년 1월20일 울산부두에 늘어선 엑셀 5도어 1050대가 올리브에이스호에 선적되기 시작했다. 현대차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한국 자동차산업의 숙원이었던 미국시장 진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7대의 포니가 처음으로 수출된 중남미 지역은 지난해 8월23일자로 누적수출 물량이 100만대를 넘어섰다. 중남미 수출이 10만대를 넘는데 17년이 걸렸지만 50만대를 넘는데는 7년, 100만대를 넘는데는 6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현대차의 수출역사를 압축적으로 설명해준다.

현대차가 수출시장에서 늘 승승장구 한 것은 아니다. 미국 자동차산업 호황기의 끝자락이던 1986년 현대차는 ‘엑셀신화‘를 일으키며 미국시장에 화려하게 진출했다. 
 
하지만 미국 경기침체에 따른 자동차수요 급감, 일본차로 촉발된 공급과잉, 원화강세에 따른 수출차량의 가격경쟁력 악화로 1989년 이후 미국판매가 급감했다.

설상가상으로 현대차는 1989년 7월 쏘나타를 생산하는 첫 해외 생산공장으로 캐나다에 부르몽 공장을 준공했지만 마침 불어닥친 북미시장 침체와 경쟁심화로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가동률이 무려 20%선까지 떨어지고 이는 곧 품질 저하로 이어졌다. 결국 브루몽공장은 1993년 문을 닫았다. 이후 현대차는 북미시장에서 ‘품질‘에 관한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이 취임하면서 현대차는 달라졌다. 정몽구 회장의 취임 일성은 ‘품질 제일주의’였다. 정 회장은 취임 초기 리콜사례가 빈발하자 현대차의 관리자급 임직원들로부터 ‘신차결함 때는 어떠한 책임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받기도 했다.
 
정 회장은 ‘6시그마 제도’를 도입하고 TQC(전사적 품질관리), VE(가치공학), TPM(전사적 예방보전), CR(원가절감)등 다양한 품질개선 운동을 전개했다. 2002년에는 품질총괄본부를 설치했고 2003년에는 북미에도 해외품질 조직을 신설했다.
 
지난 2000년 미국에서 ‘10년 10만마일 보증제도’를 도입할 때도 주변에서 “재무적 부담이 너무 커질 수 있다”며 극구 만류했지만, “고장나지 않는 차를 만들면 될 것 아니냐”며 저돌적인 추진력을 보여준 일화는 정 회장의 ‘품질혁신’에 대한 의지를 잘 보여준다.
 
정몽구 회장과 현대차의 이같은 노력은 점차 그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J.D파워의 신차품질조사(IQS)에서 현대차의 순위는 2000년 34위에서 2003년 23위, 2004년 7위로 급상승했고, 2006년 벤츠 BMW 도요타 등을 제치고 3위로 올라섰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소비자들은 태평양전쟁 패전국인 일본의 제품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도요타(TOYOTA)를 부를 때도 ‘토이오토(Toy Auto)’ 즉 장난감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후 수십년간 도요타는 “싸구려차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도요타 에이지 회장은 1983년 도요타 임원회의에서 ‘럭셔리 카’ 참여 방침을 전달했다. 해외시장, 특히 미국시장에서 ‘도요타 브랜드’로는 더 이상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드디어 1989년 ‘렉서스(LEXUS) 브랜드’를 출범시키고, 첫 모델로 4000cc급 럭셔리 세단을 의미하는 ‘LS400’을 미국시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미국소비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도요타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탓이다. 미국 포춘誌는 “중산층을 위한 차에 주력해오던 도요타가 상류사회를 겨냥하고 나섰다는 것은 맥도널드가 비프 웰링턴 같은 고급 요리에 도전하는 것과 같다”고 조롱했다.
 
하지만 18여년이 지난 지금은 ‘렉서스’를 신화로 부른다. 벤츠와 BMW가 독식해온 고급차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고, 럭셔리카 브랜드인 ‘렉서스’는 범용차 브랜드인 ‘도요타’의 이미지까지 급상승 시켰다. 이는 도요타가 미국 제너럴모터스(GM)를 꺾고 세계 자동차 1위 로 도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현대차가 ‘렉서스 신화’를 다시 창조할지 주목을 받고 있다. ‘렉서스’처럼 별도의 고급차 브랜드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제네시스’로 대변되는 고급차 출시를 통해 ‘현대차 브랜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계획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 현대차가 야심차게 내놓은 대형프리미엄 세단 제네시스의 모습, 현대차는 제네시스를 통해 품질혁신의 새로운 장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2005년 8월. 현대차는 그동안 비밀리에 추진해온 프리미엄급 대형세단 ‘BH(제네시스의 개발코드명)’의 시작(試作)차를 만들어 정몽구 회장 앞에서 선보였다.
 
하지만 품평회가 시작되자 정 회장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생각했던 차량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에 관한한 웬만한 전문가가 보다 낫다고 알려진 정 회장의 안목은 남달랐다. 그런만큼 품평회에 임하는 개발자들의 마음은 조마조마할 수 밖에 없었다. 
 
김광수 현대차 남양연구소 프로젝트 2팀 부장은 “회장님이 당시 뒷부분이 작아보인다고 해서 대폭적으로 수정했다. 처음에는 잘 이해를 못했지만 완성차가 나온 이후 결국 그 때의 수정 지시가 맞았다는 것을 알게됐다”고 회고한다.
 
김 부장은 “고급차를 타깃으로 개발목표를 설정했는데, 막상 BMW, 벤츠, 렉서스를 벤치마킹해 보니 우리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일단 목표가 세워졌기 때문에 BH의 태스크포스팀(TFT)을 구성해 기존 현대차의 틀을 하나씩 깨는 작업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대차가 ‘제네시스’ 개발을 위해 지난 4년간 투입한 개발비용만 총 5000억원이다. 김 부장은 “제네시스는 현대차가 최초로 개발한 후륜구동 차량으로 지금까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을 이끌어 왔던 현대차의 모든 기술력이 집약돼 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제네시스’가 정몽구 회장 체제 이후 지속돼온 ‘품질혁신’ 프로세스의 완결편으로 보고 있다. 강력한 엔진성능과 다이내믹한 드라이빙, 최고 수준의 안전성과 혁신적인 디자인을 갖춰 현대차의 이미지를 ‘확’ 바꿀 것이란 기대도 내놓고 있다.
 
‘새로운 세기의 시작, 신기원’이란 어원을 갖고 있는 ‘제네시스’가 해외시장에서 현대차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갈지 주목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