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4번지'' ''동방순례''… 너희들 어디 있는 거니

by조선일보 기자
2008.10.09 12:00:00

[조선일보 제공]
만화가 이현세가 다시 보고 싶은 만화는 무엇일까. 헤르만 헤세의 6촌 손녀가 꼽은 '헤세의 최고작'도 궁금하다. 분야별 명사들에게 '다시 보고 싶은 책'을 물은 다음 그와 비슷한 책을 구할 수 있는 온·오프라인 서점을 찾아 나섰다.

▲ 영광서점에 책꽃이에 꽃힌 책들 / 조선영상미디어

■ 강인봉 가수·'나무자전거' 멤버|"예전엔 너도나도 '가요 대백과' 이름이 붙은 노래책을 샀어요. 책을 뒤적거리다 좋은 노래를 발견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저에겐 김의철의 '저 하늘의 구름 따라'가 그런 노래지요. '월간 팝송' 보고 음악 공부 많이 했는데, 그것도 혹시 구할 수 있을까요."
▶ 악기 상가가 모여 있는 종로구 낙원동 낙원상가 3층 320호 '중앙악기(02-3672-6000 www.chungang.com)'엔 오래 전 출판된 악보들이 많다. 영화 '해피엔드'에 최민식이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던 용산역 1번 출구 부근 '뿌리서점(02-797-4459)'에도 노래책과 '월간 팝송'이 종종 나온다.

■ 이현세 만화가|"한국 작가가 그린 보석 같은 책들이 저에게 만화가의 꿈을 길러줬지요. 재일교포 권투선수 이야기를 그린 박기정의 '도전자', 최배달에 관한 만화 고우영의 '대야망', 재일교포 형사 이야기로 마음을 설레게 했던 손의성의 '동경 4번지'가 특히 다시 보고 싶네요."
▶'진주도서'는 만화방 체인을 함께 운영하는 만화 전문 헌책방. (02)466-4960, www.jinjoobooks.co.kr 서울 상봉 2동 '좋은 책 많은데(02-434-1716 www.obestbook.com)'도 만화 애호가들 사이에선 꽤 유명하다. 부천시 도당동 '부천 만화도서관(032-320-3753· www.kclib.org)'에 들러 귀한 만화를 읽고 와도 좋겠다.

▲ 윤성근씨(오른쪽)와 부인 성진경씨(왼쪽)가 만든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북카페와 헌책방의 좋은 점을 잘 버무렸다. / 조선영상미디어

■ 유군더트 이름가르트 전 중앙대 독문과 교수·헤르만 헤세 6촌 손녀|"한국인의 '헤세 사랑'에 놀라곤 했습니다. 그런데 헤세가 인기를 끌었던 1970·1980년대에 쏟아져 나왔던 책 중에 찾기 힘든 것도 많다고 들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 '동방순례'(Die Morgenlandfahrt)처럼요."
▶ 산더미처럼 쌓인 책을 헤집고 작은 책 한 권을 찾아내긴 쉽지 않은 일이다. 영어 공부를 겸하고 싶다면 영어로 된 헌책과 새책을 함께 파는 이태원 '왓더북(What the Book·02-797-2342·www.whatthebook.com)'에 도전해보자. 벽을 따라 영어로 된 '페이퍼백(paperback)'이 빼곡하고 군데군데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있다. 'Journey to the East'란 제목의 영문판 '동방순례'를 10월 6일 현재 1만4300원에 판매 중이다.

■ 최시영 인테리어 디자이너|"1990년대 시공사에서 낸 한국 작가 화집 시리즈 '아르 비방'(Arte Bivant)은 디자이너들 사이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임옥상 배병우 등 작가 이름을 각각 단 55권짜리 책엔 작가들이 직접 뽑은 대표작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어요."
▶홍익대 정문 부근 '온고당 서점(02-332-9313)'은 디자인 관련 헌책·새 책과 외국 잡지 과월호를 함께 판다. 창천동 '공씨책방(02-336-3058)'도 디자인 책을 많이 갖다 놓았다. 6일 인터넷 서점 '바이북(www.bybook.co.kr)'에서 각각 7000원에 팔고 있는 '아르 비방' 3권(조덕현 편), 27권(이두식 편)을 발견했다. 청계천 홍문관(02-2265-3356·평화시장 다86호)은 외국 사진집을 많이 갖춰두고 있다.

■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궁궐의 우리 나무' 저자|"성균관대 교수로 계셨던 정태현 박사는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6년 1000쪽이 넘는 한국식물도감을 내셨지요. 손으로 그린 흑백그림을 보다 보면 식물의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식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시장에 잘 나오지 않는 자연과학 서적을 구하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고구마'(www.goguma.co.kr)의 '예약주문'에 글을 올리면 직원이 어느 정도의 수수료(1000원부터)를 받고 책을 찾아서 연락해준다.

▲ 헌책방의 오랜 잡지 속에서 만난 배우들 의 앳된 모습. 왼쪽부 터 황신혜 최명길 이 보희. / 조선영상미디어

어슐러 K 르귄이나 이세룡 시인의 시집들…. 절판돼서 더 이상 구하기 힘든 책을 보기 위해 통째로 복사를 하거나 제본을 해서 베껴 갖는 것도 과연 불법일까? 정답부터. "미안하다. 불법이다."

저작권법에 따르면 '저작권 침해'는 '다른 사람의 지적(知的) 창작 노력을 훔치는 불법 행위'다. 저작권은 책을 만든 저자의 사후 50년까지 보장이 된다. 따라서 어떤 책이든 저자가 죽은 지 50년이 지나지 않았다면,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회사나 관계자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복제·제본할 수 있다. 책을 통째로 스캔해서 인터넷에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든다. 괴테처럼 죽은 지 100년이 지난 사람의 책 중에서도 절판된 책이라면…, 제본해도 괜찮나? 대한출판문화협회측은 "저자가 죽은 지 사후 100년이 됐다 해도 번역자가 살아 있거나 죽은 지 50년이 안됐다면 번역저작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그럼 책을 일부만 복사하는 건 괜찮을까? 도서관의 책을 복사할 경우, 연구 등을 목적으로 책의 '일부'를 복사하는 건 괜찮다고. 미국이나 일본의 도서관에서도 '일부 복사'는 가능하다고 한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복사하지만 않는다면 일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헌책 '고수'들은 '좋은 헌책방'이 있는 동네의 조건을 '터줏대감은 많고, 유동인구는 적은 곳'으로 친다. 오래 묵은 책들이 서점에 나올 확률이 높은 반면 그 책이 금세 빠져버릴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라고.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곳으로 은평구와 동묘 일대가 꼽힌다. 이를 증명하듯 이 두 지역엔 '헌책방은 사양산업'이라는 편견을 깨고 새로 문을 연 책방들도 눈에 띈다.

▲ 동묘에 주말에만 출몰하는 트럭 헌책방. 대부분 책을 1000원에 판다. / 조선영상미디어
은평구는 강북 최초의 '계획 개발' 지역으로 1990년대까지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1975년부터 갈현2동 먹자골목에서 헌책방을 하고 있다는 문화당 서점(02-384-3038) 박상우(60)씨는 "문학평론가 조연현, 소설가 최인호, 서예가 윤양희 선생 등이 단골"이라고 했다. 1970년대 경북 문경서 서울로 올라온 친구 20명이 '문화'라는 이름을 달고 서울 곳곳에서 헌책방을 했는데 이제는 박 사장의 책방과 정릉 문화서점, 장승배기 문화서점 세 곳만 남았다. "인터넷 서점은 안 할 것"이라는 박 사장의 뚝심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 7일 저녁에도 서울시내 한 헌책방 사장이 찾아와 책을 골라갔다. 갖춰둔 책의 면면이 범상치 않다는 얘기다.

서부경찰서 정문 부근에 지난해 문을 연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www.2sangbook.com)은 북 카페와 헌책방의 장점을 모아 놓았다. 윤성근(35)씨가 부인과 함께 운영하는데 넉넉한 원목 책상이 이전 헌책방의 '낡고 어두운 이미지'를 완전히 깨버린다. 윤씨가 모은 세계 각국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책들이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다.

주말마다 벼룩시장이 열리는 동묘역 부근은 망원역 부근에서 27년간 운영됐던 대형 헌책방 영광서점이 이사오면서 활기를 띠는 분위기. 황신혜의 풋풋한 모습을 표지에서 만날 수 있는 1970년대 '주간여성', 군대에서 쓰던 '국민독본 농업축산 기술강좌' 등 들춰만 봐도 웃음이 나는, 근대사 자료 수준의 책들이 다양하다. 부근 청계천 책방(02-2234-5976)과 헌책백화점(011-351-5636)은 주제별로 책을 분류해놨다.

동묘 헌책방의 묘미 중 하나는 주말에만 나오는 '헌책 트럭'이다. 법전·졸업앨범·옛날 잡지 부록 등 종류를 망라한 책들을 '무지개 자원' 앞 주차장에 세워둔 트럭에 산처럼 쌓아놓고 1000원에 판다. 오전 10시쯤부터 해질녘까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