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원 교수가 생전 밝힌 정신과 의사 된 이유 "아둔한 내 손으로..."

by박한나 기자
2019.01.02 09:47:34

사망 보름 전 "20년간 환자 편지 모았다.. 부디 잘 지내시길"

故 임세원 교수 추모 그림(사진=온라인 커뮤니티/원작자-늘봄재활병원 문준 원장)
[이데일리 박한나 기자] 지난달 31일 진료 중 환자가 휘두룬 흉기에 찔려 숨진 고(故) 임세원 교수의 생전 활동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날 강북삼성병원에서 진료를 보던 중 흉기 상해로 숨진 임 교수(47)는 20년간 우울증·불안장애 연구와 자살 예방에 힘 써온 신경정신의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 신경정신의학회, 대한전공의협의회 등은 생전 고인이 쓴 글을 성명서 등을 통해 공유하며 추모의 뜻을 전했다.

임 교수는 2011년 한국형 표준 자살예방 교육프로그램 ‘보고 듣고 말하기’를 개발하면서 정신과 전공의가 된 이유를 밝혔다.

임 교수가 SNS에 쓴 글 ‘흉부외과와 보고 듣고 말하기’에서 그는 1996년 흉부외과에서 인턴으로 전공의 선생님들 옆에서 배울 당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에도 환자가 사망하자 절망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상황을 전하며 그는 “아둔한 나의 손을 탓했다”며 “내 눈앞에서 누군가를 죽게 한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나는 흉부외과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흉부외과와는 가장 거리가 먼, 아둔한 손으로 최소한 환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정신과의사가 됐다”고 밝혔다.

이후 정신과 전공의 2년 차 시절, 처음 주치의를 맡았던 환자가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자 그는 또 자책하고 절망했다고 한다.



임 교수는 “손도 머리도 이렇게 아둔한 의사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라고 자문하며 “10여 년의 시간이 더 지난 후 ‘보고 듣고 말하기’를 만들었다”며 자살예방 프로그램 개발 계기와 취지를 밝혔다.

또 “우리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삶을 보호하고 싶다는 진심을,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이 주는 따뜻한 희망을 우리가 만드는 ‘보고 듣고 말하기’에 담고 있다”며 “이 프로그램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 전파되면서 우리의 진심을 전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경정신의학회는 지난 1일 발표한 임 교수에 대한 애도 성명과 함께 그가 최근에 쓴 또 다른 글을 소개했다. 사망하기 보름 전인 지난 12월 작성한 글에서 임 교수는 “20년간 환자들에게 받은 편지를 모았다”며 “모두 부디 잘 지내시길 기원한다”고 말하며 환자에 대한 마음을 드러냈다.

임 교수는 “얼마 전 응급실에서 본 환자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신 선생님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긴박감과 피 냄새의 생생함 그리고 참혹함이 주된 느낌이었으나 사실 참혹함이라면 정신과도 만만치 않다”고 글을 시작했다.

그는 “그분의 삶의 경험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참혹함이 느껴지는, 도저히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럴 때는 도대체 왜 이 분이 다른 의사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오셨는지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스스로 되뇌면서 그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 한다”고 전했다.

또 “유달리 기억에 남는 환자들은 퇴원하실 때 내게 편지를 전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20년 동안 받은 편지들을 꼬박꼬박 모아 놓은 작은 상자가 어느새 가득 찼다”고 말했다.

이어 “그분들은 내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워하시고 나 또한 그분들에게서 삶을 다시 배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나의 전공의 선생님들에게 전수되어 더 많은 환자들의 삶을 돕게 될 것”이라며 “모두 부디 잘 지내시길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대한의사협회, 신경정신의학회,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임 교수 피살 사건 후 정부에 의료인 안전성 보장과 사고 재발방지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