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영화기행]'투스카나의 태양' 이탈리아

by조선일보 기자
2006.06.14 12:35:00

프랜시스를 유혹했던 술 레몬첼로…단맛은 짧고 쓴맛은 길어
가장 예쁜 풍경은 ‘투스카니의 태양’에 등장했던 작은 마을 포시타노가 빚어냈다

[포시타노(이탈리아)=조선일보 제공] 작품 속 공간에 꼭 가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이탈리아 관광청에서 돈을 대어 만든 홍보영화라고 해도 믿을 법한 ‘투스카니의 태양’을 봤을 때, 언젠가 영화의 흔적을 좇아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리라 결심했다. 토스카나(투스카니는 영어 이름) 지방의 피렌체와 코르토나에서 남부의 포시타노까지. 로마와 베네치아만 방문한 뒤 이탈리아를 알게 됐다고 여겼던 이전 판단은 경솔한 착각이었다.



피렌체 두오모(대성당)를 나설 때 비가 쏟아졌다. 다양한 색상의 외벽에 붉은 돔을 지닌 이 성당은 웅장하면서도 예쁜 흔치 않은 매력을 지녔다.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고 삶의 바닥에서 이탈리아로 도망치듯 떠났던 미국 여성 프랜시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 피렌체 두오모는 그녀의 첫 여행지인 동시에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연인들이 10년 후 재회하기로 약속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 먹거리를 파는 간이상점이 줄지어 선 폼페이의 거리
갑작스런 비에 당황할 때 아랍계 우산 장수들이 몰려들었다. 5 유로(6000원)를 치른 뒤 붉은색을 집어들었다. 투어 버스에서 내리며 프랜시스가 펴든 것도 붉은색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것은 우산이 아니라 양산이었다. ‘색깔’은 흉내낼 수 있어도 ‘용도’까지 맞출 순 없는 것. 환상과 현실은 의지로 간신히 만나 우연으로 쉽사리 헤어졌다.

베키오 다리와 우피치 미술관을 지나 갖가지 조각상들로 공간 전체가 야외 미술관 같은 시뇨리아 광장에 이르는 사이 하늘이 맑게 개었다. 비가 올 땐 시 전체가 텅 비고 우울한 느낌이었지만, 어느새 광장엔 햇볕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부챗살처럼 퍼져서 쏟아지는 빛 속에서 모두들 행복해 보였다. 날씨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상상의 낙원에서 환희에 젖기도 하고 관계의 지옥에서 몸부림칠 때도 있지만, 인간 내면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프랜시스라면 어땠을까. 수십년 믿어오던 삶으로부터 배신당한 뒤 처음 발디딘 이 피렌체의 눈부신 햇살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 꽃과 그림과 사람이 어우러진 포시타노의 꽃길
코르토나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한밤에 도착한 산꼭대기의 소도시 코르토나는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였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작은 성문을 지나 급경사 골목길로 차를 몰다보니 요새 같은 구조에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호텔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볼 때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창 아래 내려다보이는 집들의 붉은 기와였다. 저 멀리 탁 트인 평원과 정감 어린 농촌 마을로 이뤄진 원경이, 세월의 더께를 이고서 자연을 닮아가는 기와의 근경과 어울리면서 잊지 못할 그림 하나를 그려줬다. 프랜시스가 피렌체에 이어 들른 이 도시에 반해 충동적으로 집을 구입할 만했다. 이 영화 영향인지, 묵었던 호텔 로비엔 부동산 매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담장 틈 사이 탐스럽게 핀 들꽃에 경탄하며 프랜시스가 구입했던 성 밖 전원주택 ‘브라마솔레’로 갔다. 코르토나 주민들은 그곳에서 촬영한 ‘투스카니의 태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브라마솔레로 가는 4㎞ 남짓 산길이 쉽지 않아 몇 차례 멈췄을 때, 이탈리아 사람들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친절로 안내를 해줬다. 5분 가까이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올바른 방향을 놓고 언쟁까지 벌이는 커플도 있었다. 굼베이 댄스 밴드의 시디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노래 ‘Sun Of Jamaica’를 듣다가 문득 자메이카의 태양을 상상했다. 이런 투스카니의 태양을 보러와서 또다시 자메이카의 태양을 상상하다니. 어처구니없지만 환상은 늘 원심력으로 작동했다.



가까스로 찾은 브라마솔레는 주황색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고택이었다. 그러나 산 중턱의 탁월한 전망을 가진, 잘 단장된 정원 위에 부드럽게 얹힌 2층집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이 집을 산 프랜시스는 인부를 고용해 대대적으로 손을 본다. 어차피 여행이란 삶을 수리하는 기간이니까.


▲ 색색으로 절벽에 박힌 집들이 아름다운 포시타노의 해변 포시타노


소렌토에서 시작하는 40㎞의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아말피 해안)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해안 절벽을 끼고 굽이굽이 돌며 감겼다 풀리는 해안 도로는 탁월한 풍광을 내내 선사했다.

가장 예쁜 풍경은 ‘투스카니의 태양’에 등장했던 작은 마을 포시타노가 빚어냈다. 색색으로 아름답게 박힌 절벽의 집들은 강렬한 햇살을 조명 삼아 뽀얗게 빛났고, 미로 같은 골목은 천장까지 4면을 둘러싼 꽃 장식과 개성 넘치는 가게들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변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온통 하얀 산타 마리아 아순타 성당을 지날 때 때마침 예식을 끝낸 하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때마침 오후 4시가 되자 맑은 종소리가 푸르게 울려퍼졌다. 포시타노만큼 결혼식에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프랜시스 역시 이곳에서 만난 멋진 이탈리아 남자 마르첼로와의 낭만적 결혼을 꿈꿨다.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 찾아온 사랑에 중년 여인은 가슴 설레며 달콤한 기대에 젖었다. 이곳으로 프랜시스를 데려온 마르첼로는 그녀에게 지역 특산주인 레몬첼로를 맛보게 하며 감미롭게 유혹했다.

음료수와 술을 파는 곳에 들어가 첼로 모양의 유리병에 담긴 레몬첼로 한 병을 샀다. 한 모금 맛보니 먼저 레몬향이 입천장으로 퍼지며 휘발된 뒤 돗수 높은 알코올이 혀를 골고루 찌르며 가라앉았다. 단맛은 짧게 머물렀고 쓴맛은 길게 남았다. 마르첼로는 레몬첼로가 25%의 설탕과 75%의 알코올로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삶 역시 그런 게 아닐까. 25%의 단맛과 75%의 쓴맛. 출산을 앞둔 친구 때문에 마르첼로와의 약속을 미룰 수밖에 없었던 프랜시스는 사랑을 찾아 다시 포시타노에 오지만, 그 사이 마르첼로가 결혼해버린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그녀는 모든 좌절을 이겨낸다. 거듭 사랑을 잃고서야 이국 마을에서 새 인생행로를 발견한다. ‘투스카니의 태양’은 프랜시스의 내레이션으로 끝났다. “뜻밖의 일은 항상 생긴다. 그로 인해 인생이 달라진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조차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더 놀랍다.” 그리스의 섬 카스텔로리조에서 뉴질랜드의 도시 크라이스트처치까지, 각지를 다니다 보면 여행왔다 그대로 눌러앉아 새 삶을 사는 사람들과 종종 마주쳤다. 마음만 고쳐 먹으면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훌훌 털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면 진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레몬첼로 값을 치르려 가방을 뒤지다 손에 비행기표가 걸렸다. 다음날 오후 2시30분. 내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거기 적혀 있었다. 저 멀리 바다의 실존이 홀로 시퍼렇게 빛났다.



오드리 웰스가 감독하고 다이안 레인이 주연한 ‘투스카니의 태양’은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일종의 성장영화.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통보받고 괴로워하던 프랜시스는 친구들의 강권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소도시 코르토나에 들렀다가 매물로 나온 집에 끌려 덜컥 구입한 그녀는 폴란드 인부들을 고용해 대대적으로 집 수리에 나서는 한편 이탈리아 남자 마르첼로와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여행수첩=이탈리아 토스카나는 예술 역사 자연이 멋지게 어우러진 지방이다. 중심도시 피렌체는 장엄한 두오모(대성당),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소장하고 있는 우피치 미술관, 활기로 가득한 시뇨리아 광장, 보석과 기념품 가게들이 들어선 베키오 다리, 시가지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 등 볼거리로 가득하다. 중세 성곽 풍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코르토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 보석 산업으로 유명한 아레초 등도 토스카나에서 들를 만한 도시다. ‘투스칸 선 페스티벌’이 8월5일부터 20일까지 열린다. 이탈리아 남부 휴양지 포시타노는 자동차로 로마 남쪽 3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빼어난 경관에 예쁜 집들이 어울려 마을 전체가 아름답다. 포시타노로 가는 길에 폼페이의 고대 유적과 소렌토의 탁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