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소비 현장점검)①빚에 자살하는데 소비회복 `글쎄`

by지영한 기자
2009.11.24 11:35:22

대출기피와 실업률 상승에 美소비자 지출여력 한계
경제위기 이후 씀씀이 줄고, 스마트 컨슈머는 늘고

[뉴욕=이데일리 지영한특파원] 이번주 목요일 추수감사절 다음날인 금요일은 소매점들이 `폭탄세일`을 펼치는 `블랙 프라이데이`다. 미국은 이날부터 크리스마스까지 이어지는 `홀리데이 쇼핑 시즌`에 돌입한다. 그러나 소매점들은 연말 대목을 `설레임 반, 우려 반`으로 기다리고 있다. 소비자금융 경색과 실업률 상승으로 소비자들의 지출여력이 크게 위축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크게 늘어난 `스마트(smart)`하고 `분별있는(conscientious)` 소비자들을 상대하기도 만만찮다. 이데일리는 `홀리데이 쇼핑 시즌`을 앞두고 미국의 소비현장을 4회에 걸쳐 점검해 본다. - 편집자주   
 

▲ 리차드 버드씨는 목숨을 끊기전 TV 방송에 출연해 향후 자동차시장에 대한 기대감을 피력했지만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지난 10일 새벽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대형 자동차 딜러점을 운용하던 리차드 버드(43)씨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는 TV 광고에 자주 출연한 인물로 얼굴이 꽤나 알려져 지역사회의 충격이 컸다.  부검결과 사인은 자살로 드러났다. 경찰은 버드씨가 불황기에 자금난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했다.
 
대공황 이래 최악의 리세션을 맞아 목숨을 끊는 미국인이 비단 버드 씨만이 아닌 듯 싶다. 미국 국립자살방지라이프라인에 접수된 자살상담은 2008년 이전만 해도 월간 4만건이 넘지 않았지만 작년 10월 5만868건, 금년 7월 5만7625건으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교포 은행가는 안타까운 사실을 전했다. 금융위기 이후 교포 고객중 목숨을 끊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자금난으로 자살하는 교포들이 뉴욕과 뉴저지는 물론이고 캘리포니아, 앨라배마, 조지아 등 미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은행가는 "조지 워싱턴 브릿지(맨해튼과 뉴저지를 잇는 다리)에서 자살하면 언론에 보도가 되겠지만, 가족들이 대부분 쉬쉬하고 있다"며 "금융위기 이후 교포들의 자살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미국 전역의 자살률이 집계되는데는 3년 정도 걸린다. 이 때문에 가장 최근의 통계는 2006년에 기록한 10만명당 11.1명이다. 이에 따라 이번 리세션이 미국인들의 자살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미국인 자살건수는 실업률이 25%에 달했던 1932년 이듬해에 10만명당 17.4명으로 가장 높았다. 따라서 미국의 실업률이 26년만에 10%를 돌파한 현재 상황은 걱정스러울 수 밖에 없다. 웨인주립대에서 자살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스티븐 스택 교수는 "대규모 실업이 눈에 띄게 증가할 때는 자살률이 매우 빠르게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자살의 이유는 다양하기 때문에 오로지 경제적인 문제만으로 자살이 증가한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99°C에서 끓지 않던 물이 비로소 100°C에 끓는 것처럼 한계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실직이나 주택차압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은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반면 미국 경제의 개선 징후도 보이고 있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 3분기 연율 기준으로 플러스 성장세로 돌아섰다. 꼭 1년만이다. 기업들의 실적도 개선되고 있다.상장기업중 3분기 이익이 애널리스트 예상치를 웃돈 경우가 80%를 상회했다. 
 
그러나 미국 경제가 플러스 성장세로 돌아선 배경은 민간 소비가 되살아난 결과가 아니다. 정부의 경기부양책, 즉 생애 첫 주택구입자에 대한 세제지원과 7~8월 한시적으로 시행된 중고차 현금보상 프로그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업들의 3분기 순이익도 감원과 비용절감 등 일요회성 요인이 주된 배경이다.
 
오히려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의 대출기피 현상이 지속되면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그리고 일반 소비자들의 자금난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3분기 GDP가 플러스로 돌아섰지만 일반 미국인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썩 좋지 않다.
 
뉴저지주 버겐카운티에서 교사로 일하는 다이애나 렉케이(여·42)씨는 기자에게 "경제 상황이 매우 불안정(very unsteady)하고, 미래도 불확실해 보인다"며 "이웃들이 쇼핑몰에는 가지만 소비를 억누르고 있고, 지출을 늘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더욱이 "버겐카운티 지역의 주택관련 세금마저 오르면서 이 지역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며 "금융위기 이후 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렉케이는 "미국인 주택소유자들의 `엑소더스`가 이루어지자, 해외 투자자들이 이 지역 주택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덧붙였다.

 
▲ 금융위기를 겪으며 미국인들이 씀씀이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고 있다. 뉴욕의 대형 쇼핑몰 선물코너 앞자리를 차지한 돼지저금통./뉴욕=지영한 기자
금융위기 이전만해도 미국인들은 돈을 펑펑썼다. 주가 상승으로 가계자산이 늘어난 가운데 특히 집값이 계속해서 오르자, 집값 상승분 만큼 `홈 에쿼티론`을 받아 돈을 흥청망청 쓴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과거 6~7%를 보였던 미국의 저축률은 금융위기 직전에 마이너스를 보이기도 했다. 미국의 가정들이 자신들의 여윳돈을 모두 쓰고, 은행의 빚까지 얻어 지출에 나섰다는 얘기다. 
 
그러나 미국의 주택시장 붕괴로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집값 하락으로 주택의 담보가치가 모기지 대출보다 낮은 언더워터(Underwater) 상태의 주택, 즉 `깡통주택`들이 속출하면서 `홈 에쿼티론`은 아예 실종된 상태이다.
 
더욱이 소상공인과 일반 개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소규모 지역 은행중 상당수가 부동산 담보 대출 부실 여파로 파산에 내몰리고 있다. 여기에다 크든 작든 미국의 은행들은 자본금 확충과 부실자산 처리까지 강요받고 있어, 은행들의 대출기피로 대출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있다.
 
교포 은행가는 "요즘은 은행들이 죽게 생겼기 때문에, 대출 신청이 들어오면 상당수를 거절하고 있다"며 "대기업들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고 하지만, 소상공인과 가계의 자금난 해소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의 대출이 막히면서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패턴도 크게 변했다. 금융위기 이전에 마이너스까지 떨어졌던 저축률은 5%선으로 상승했다. 그 만큼 미국인들이 소비를 꺼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손성원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석좌 교수는 "실업률이 크게 상승해 소비자들이 돈을 쓸 여력이 없고, 앞으로도 실업률이 더 오를 가능성이 있어 돈이 있는 소비자들도 소비를 꺼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손 교수는 "과거에는 소비자들이 홈 에쿼티론으로 돈을 빌려 소비했는데, 지금은 실업률 때문에 현실적으로 은행 융자가 어렵다"며 "미국인들은 이제 빚을 져서까지 소비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금융위기로 축소된 가계자산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미국 가계의 저축률은 향후 7~8%까지 더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아울러 "미국의 소비자들이 필수품에 한해 실용적으로 구매를 하되, 인센티브가 없으면 지갑을 쉽게 열려하지 않을 것"이라며 위기 이후 미국인들의 변화된 소비패턴을 설명했다. 좋게 말해 미국 소비자들이 `스마트`하게 변한 것이고, 달리 표현하면 `짠돌이`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