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떡 신사''에 반하고 ''마약김밥''에 취하다
by조선일보 기자
2010.03.11 11:38:00
[숨은 서울 걷기] 먹자골목의 스펙터클, 종로5가 ''광장시장''
[조선일보 제공]
모로코의 항구 도시 탕헤르에서 기차로 11시간을 꼬박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사막 위의 오아시스' 마라케시. 밤 9시 5분에 출발하는 야간 기차를 타고 아침 8시쯤 기진맥진한 상태로 마라케시 기차역에 도착하면 먹이를 찾아 나온 승냥이 같은 택시 기사들이 거의 납치 수준으로 관광객을 쓸어간다. 예약한 호텔이 마땅히 없다면 그들이 데려다 주는 목적지는 한결같다. 마라케시 메디나(구시가지)의 상징과도 같은 '제마 엘프나(Djemaa el Fna)' 광장.
아침나절의 제마 엘프나 광장은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볼 게 없는 황량한 공터에 지나지 않는다. 광장을 뒹굴고 있는 쓰레기더미만이 간밤의 뜨거웠던 열기를 간신히 읊조려 줄 뿐이다.
하지만 오후가 되고, 밤이 찾아오면 광장의 색깔은 완전히 달라진다. 대낮의 열기를 피해 방 안에 꼭꼭 숨어 있던 사람들은 밤이 되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장을 세우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잠실 주경기장보다 큰 광장에 크고 작은 천막 음식점들이 빼곡히 들어찬다. 맛있는 모로코식 꼬치구이를 먹어보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장사꾼들, 술잔을 기울이며 왁자지껄하며 떠드는 손님들, 흥미롭게 시장의 열기를 지켜보는 관광객들 사이로 뽀얀 음식 연기가 야릇하게 떠다닌다. 10세기 무렵, 번성했던 이슬람 거리로 순간이동을 한 느낌이다.
| ▲ 광장시장 먹자골목.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명물 맛집들이 수두룩해 어디서부터 리스트를 나열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다. 조선영상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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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마 엘프나 광장의 먹자골목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도시 사람들의 풀어헤쳐진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막 도시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승냥이처럼 무서워 보였던 사람들이, 시장의 딱딱한 탁자에서 마주 보고 있으면 어느새 친구처럼 정겹게 느껴진다. 시장의 매력은 그런 것이다. 동네 사람이 대충 묶은 머리카락을 휘저으며 그날 식탁에 올릴 하루치의 음식을 걷어가는 곳, 성장(盛裝)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오락가락 어깨를 마주치며 필요한 물건들을 고르는 곳. 시장에 나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자기 집 안방에서 짓던 무심한 듯 평화로운 표정이 그대로 살아 있다.
제마 엘프나 광장과 비슷한, 서울 서민들의 일상이 녹아든 '표정 백화점'을 꼽으라면 단연 서울 종로5가 광장시장의 먹자골목이다. 시장의 본분은 자고로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지만, 시장이 형성된 지 40여년이 흐른 지금, 한복과 혼수용품, 구제의류를 주로 파는 광장시장은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 사대문 안 최고의 먹자골목으로 성장했다.
광장시장 입구에서 손님을 먼저 반기는 것은 '순이네 빈대떡'과 '박가네 빈대떡'. 갈아놓은 녹두에 야채와 고기를 숭숭 썰어 넣고 기름에 지져낸 큼지막한 빈대떡이 술 좋아하는 '빈대떡 신사'의 앞길을 수시로 가로막는다. 4000원짜리 녹두전과 3000원짜리 막걸리 한 통이면 어느새 술상 한상이 번드르르하게 차려진다.
광장시장 메인 먹자 거리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꼬마김밥'은 별달리 들어가는 것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먹을수록 '당기는' 마약 같은 맛을 자랑한다. 그래서 원래 상호인 '꼬마김밥'보다 '마약김밥'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얇게 썬 단무지와 당근이 제멋대로 박혀 있는 손가락 크기의 김밥은, 겉보기엔 한없이 볼품없지만 소스에 찍어 한 입 베어 물면 김밥에 바른 고소한 참기름과 깨, 겨자 소스의 맛이 어우러져 환상의 하모니를 이룬다.
시장통은 자고로 그 도시 최고의 서민음식이 한데 모이는 곳. 광장시장에서 찾을 수 없는 서민음식은 단언컨대 한 가지도 없다. 추운 겨울에는 '수원 아줌마'가 떠주는 따뜻한 팥죽과 호박죽, 내장이 잔뜩 들어간 '은성횟집'의 대구 매운탕, 김 가루가 수북하게 뿌려진 '강원도 칼국수', '할머니집 순대'의 푸짐한 순대국밥으로 속을 푸는 게 좋다. 뜨거운 국물보다 쫄깃쫄깃 씹는 맛을 즐기고 싶다면 광장시장의 별미인 통통한 순대나 양념으로 맛을 낸 돼지껍데기, 등심보다 맛있는 돼지고기와 곰장어를 즐기는 것도 제격이다. 특히 광장시장의 순대는 일반 순대와 달리 양념이 깊이 배어 있고 살이 통통해 이곳 순대에 맛을 들이면 딴 데서는 죽어도 순대를 못 먹는 불상사가 생긴다. '오라이 등심'이나 '남매등심'의 돼지고기 역시 매콤한 양념을 발라 구워낸 맛이 일반 돼지갈비나 제육볶음과 사뭇 달라 한번 맛을 들이면 섣불리 다른 돼지에 입을 대지 못한다.
오후 느지막이 시장에 나와 맛집 순례를 다니다 보면 어느새 저녁 무렵. 광장시장이 살아나는 시간은 모로코의 제마 엘프나 광장과 비슷한 바로 그 시간이다. 이집저집 옮겨 다니며 손님들이 회와 순대 한 접시로 배를 채우는 동안, 색소폰을 품에 안은 아저씨가 과일 상자로 만든 작은 무대에 올라 음악 한 곡조를 멋지게 뽑아 올린다. 사람들의 얼굴에선 맛있는 행복이 절로 피어오른다. 북아프리카 낯선 시장에서 느꼈던 이국적인 정취보다 훨씬 정겹고 오묘한 표정 백화점, 뜨거운 삶의 용광로다.
1 꼬마김밥 (02)2264-7668
2 은성횟집 (02)2267-6813
3 순이네 빈대떡 (02)2268-3344
박가네 빈대떡 (02)2268-0610
4 수원 아줌마 (02)2271-2627
5 할머니집 순대 (02)2274-1332
6 강원도 칼국수 (02)2269-1387
7 남매 등심 (02)2272-3034
8 오라이 등심 (02)2279-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