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별곡 800리, 걷기 코스로 되살아난다
by조선일보 기자
2009.10.15 11:45:00
[조선일보 제공]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워 있었더니/관동 팔백리에 방면을 맡기시니/아아, 성은이야말로 갈수록 끝이 없구나…' 조선 중기 정치가이자 시인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이 쓴 '관동별곡(關東別曲)' 첫 구절이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 누구나 한 번은 읽었을 관동별곡이 걷기 코스로 살아난다. 강원도 최북단 고성에서부터 최남단 삼척까지, 풍광 수려한 바닷가 길들을 잇고 이어 800리 걷기 코스로 꿰었다.
| ▲ 송강 정철도 이 바닷가를 걸었을까. 가을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해 뜰 무렵 강원도 고성 공현진해수욕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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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별곡 800리 걷기 코스'. 기존 바닷가 길들을 잇고 걸을 수 있도록 화살표 등 표지를 요소요소에 배치한다. 제주 올레와 비슷한 방식이다. 세계걷기운동본부가 만들고 고성군, 속초시, 양양군, 강릉시, 동해시, 삼척시 등 강원도 지자체가 후원 협조했다. 세계걷기운동본부는 10월 17일부터 25일까지 '관동별곡 800리 세계 슬로우 걷기 축제'를 진행할 계획이다.
걷기 코스가 관동별곡에 나오는 모든 풍광을 아우르지는 못한다. 관동별곡에서 송강은 한양에서 왕을 알현한 후, 지금의 남양주와 여주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오늘날 도지사)로 원주에 부임한다. "감영 안이 무사하고 시절이 삼월인 제" 내금강을 통해 금강산에 들어간다. 만폭동, 진헐대 등 금강산 절경을 두루 관람한 뒤 외금강을 통해 강원도 동해안으로 빠져나온다. 고성 삼일포와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를 거쳐 지금은 경상북도의 일부가 된 울진 망양정에서 여정을 마친다.
| ▲ 강원도 고성 청간정. 관동8경 중 하나로 관동별곡에도 등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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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금강산과 삼일포는 현재 북한 땅이니 당연히 걸을 수 없다. 그래서 걷기 코스는 고성군 금강산콘도에서 출발한다. 또 지금은 경북인 울진 망양정과 평해 월송정은 코스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800리(약 320㎞)에 못미치는 것 아닌가? 세계걷기본부 정준 사무총장은 "들쭉날쭉한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보니 약 300㎞쯤으로, 800리에서 크게 모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세계걷기운동본부에서는 하루 종일 걸으면 고성 금강산콘도에서 삼척 죽서루까지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계산하고 있다.
관동별곡을 걷기 코스로 만들겠다는 건 정준 사무총장의 오랜 꿈이었다. "걷겠다고 비행기 타고서 산티아고까지 가지 않습니까. 올레 걷겠다고 제주도까지 가지 않습니까. 강원도 동해안은 서너 시간이면 됩니다. 얼마나 가까워요. 한국 최고의 가사문학 작품으로 꼽히는 관동별곡의 배경이 된 땅이니 얼마나 의미가 있습니까?"
국내 최초로 송강 정철의 평전(評傳)을 쓴 강릉원주대 박영주 교수는 "금강산과 관동팔경 유람은 조선조 사대부의 필수 교양코스"라고 했다. "선비들은 산천경계를 둘러보며 답답한 기운을 떨쳐버리고 호연지기를 키우고, 정신이 활짝 펼쳐져 열리는 상쾌한 상태 즉 창신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함이었지요."
문득 의문이 생긴다. '송강이 관동800리를 진짜 걷고 나서 관동별곡을 썼을까?' "송강이 실제로 유람하고 관동별곡을 쓴 건 분명합니다. 송강이 금강산과 관동800리를 찾은 건 관할 구역을 순시한다는 의미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가마나 말을 탔겠지요. 수행원이 있었겠지요."
조선시대 금강산을 거쳐 관동800리를 둘러보려면 얼마나 걸렸을까? "관동별곡에 '감영 안이 무사하고 시절이 삼월인 제'라는 구절로 보아 봄에 출발했겠죠. 또 망양정에서 밤에 월출(月出)을 기다린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추우면 어떻게 달 뜨기를 기다리겠어요? 그래서 짧으면 한 달, 길어야 세 달 정도 걸렸으리라 추측합니다."
박 교수는 관동800리를 걷는 의미는 조선을 넘어 신라(新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화랑은 명산대천에 국가와 백성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제집단이었습니다. 관동800리는 화랑의 순례처라고 봅니다. 관동8경 중 어느 곳 하나 화랑(花郞)과 연관되지 않은 게 없습니다."
송강이 걷고 화랑이 걸은 길, 이제 누가 걸을까.
| ▲ 앞은 황금빛 물결, 뒤는 은빛 물결. 송정호를 끼고 걷는 구간으로, 관동별곡 800리 걷기 코스의 백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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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별곡 800리 걷기 코스. 걷기 마니아에겐 더없이 행복한 일주일 여정이 된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체력이 부족하다면 버거운 거리이다. 그래서 약 300㎞ 코스 중 백미(白眉) 2구간을 골랐다. 해돋이가 장관인 고성군 '거진등대공원 코스'와 조선시대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왕곡(旺谷)마을과 송지호(松池湖)를 끼고 도는 '송지호 코스'다. 송지호 코스 약 6㎞, 거진등대공원 코스 약 4㎞. 두 코스 모두 1시간 정도면 충분히 돌 수 있다.
7번 국도에서 '고성왕곡마을' 표지판이 보이면 오른쪽 좁은 길로 들어간다. 조금 걸으면 왼쪽에 주차장이 보인다. 여기 차를 세운다. 주차장을 나와 진행하던 방향으로 계속 걷는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이다. 오르막을 넘으면 소나무숲을 가운데 두고 길이 갈라진다. 오른쪽 조금 더 좁은 길로 들어선다.
소나무 아래 왕곡마을 안내판이 서 있다. 내용을 읽어본다.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고려에 충성하는 강릉(양근) 함씨가 이곳에 들어와 동족마을을 형성하였다. 오음산을 중심으로 다섯 개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송지호와 함께 마을을 보호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오봉리라 이름하였다.'
안내판을 뒤로하고 계속 걷는다. 야트막한 돌담 뒤로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가 심어져 있다. 감나무 뒤로 초가집과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19세기 전후 만든 북방식 전통 한옥 21채가 보존돼 있다. 용인 민속촌과 함께 전국에서 둘밖에 없는 국가 지정 민속마을이라고 한다.
민속촌과 달리 아직도 사람들이 사는, 살아있는 한옥이다. 이곳 사람들 사는 모습이 보고 싶다면 오른쪽 집들 사이로 난 길로 들어간다. 이른 아침,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무럭무럭 올라온다. 특이하게도 굴뚝마다 항아리를 얹어 놓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옛날부터 그렇게 해왔단다. 초가지붕에는 박이 주렁주렁 달렸다. 지붕 아래서 참새가 나와 낯선 이에게 조잘조잘 경계하는 소리를 낸다. 400여년 전 송강 정철이 여길 찾았을 때도 이 모습 그대로 아니었을까.
다시 걷기 코스를 밟는다. '오봉막국수'와 '왕곡정미소'를 왼쪽에 두고 걷는다. 곧 오른쪽에 그네가 보인다. 그네를 지나면 어느덧 마을을 빠져나온다. 작은 사거리다. 사거리 맞은편은 온통 황금빛이다. 추수를 기다리는 논이다.
길을 건너 좌회전한다.
조금 걸으면 곧 오른쪽에 좁은 길이 나타난다. 이 길로 접어든다. 낮은 언덕을 넘자마자 시야가 터지듯 넓어진다. 황금빛 논이 보이고, 그 뒤로 송지호 표면이 햇살을 반짝반짝 반사한다. 이 장관을 바라보면서 직진한다. 다시 작은 사거리. 호수를 오른쪽으로 두고 왼쪽 흙길로 접어든다. 길은 호수 왼편을 끼고 돈다.
7번 국도를 지나는 차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기 시작할 무렵 길이 다시 갈라진다. 오른쪽 길이 언뜻 송지호로 향할 것 같지만, 이어지지 않는 막다른 길이다. 왼쪽을 택한다. 곧 철조망이 보인다. 철조망 문을 지나면 오솔길이다. 오솔길 왼쪽 위가 7번 국도이다.
오솔길이 끝날 즈음 '철새관망타워'가 눈앞에 우뚝 서 있다. 관망타워에 올라가면 송지호와 송지호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입장료 어른 1000원. 오전 9시~오후 6시 연중무휴 (033)680-3556
오솔길을 되돌아 걷는다. 철조망 문을 통과해 계속 직진한다. '고성왕곡마을' 표시판이 다시 보인다. 우회전해 왕곡마을 방향으로 걷는다. 주차장이 보인다. 더 길게 걷고 싶다면 공현진해수욕장 주차장에서 출발했다가 되돌아오면 된다.
거진항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골목을 조금 들어가면 '대왕슈퍼'가 보인다. 걷기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대왕슈퍼 맞은편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오르막을 조금 걸으면 볼록거울을 사이에 두고 골목길이 갈라진다. 오른쪽을 택한다. 다시 골목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갈림목이 나온다. 이번엔 왼쪽으로 간다.
시야가 탁 트이면서 작은 주차장이 언덕 끝에 있다.
주차장 왼쪽으로 돌을 촘촘하게 박은 오르막길이 보인다. 이 길로 올라간다. 여기부터 '거진등대공원'이다. 경사가 꽤 가파르다. 길은 소나무숲 사이로 크게 U자로 돈다. 오른쪽 흙길로 들어선다. 사람 하나가 겨우 걸을 정도로 좁은 흙길이다. 솔잎이 쌓여 폭신하다.
흙길이 갑자기 끝나는가 싶더니 동해가 거침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쪽으로 거진항이 보인다. 방파제에 파도 부딪히는 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강렬하다.
몸을 180도 틀어 언덕을 오른다. 동해가 이제 오른쪽 언덕 아래에서 으르렁거린다. 앞쪽 왼편으로 하얀 등대가 보인다. 등대를 둘러싼 흰색 담을 왼쪽에 두고 계속 걷는다. 언덕을 오를수록 바람이 거세진다. 여기 맞춰 파도 소리도 계속 커진다.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길에서 왼쪽 흙길로 직진하듯 걷는다. 오른쪽 블록 깔린 길은 삼림욕 오솔길이다. 다시 이정표가 나온다. '샘터·화장실' 방향으로 계속 직진한다.
오른쪽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동해가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곧 앞 오른편으로 팔각지붕 2층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 앞 큰 바위에 '거진해맞이봉 산림욕장'이라고 세로로 새겨져 있다. 거진등대공원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오른쪽은 남한, 왼쪽은 북한, 정면은 수평선이다.
바다를 실컷 봤으면 전망대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올라오던 길을 같은 방향으로 다시 걷는다. 얕은 오르막을 넘으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길 오른편에 서 있다. 계속 직진. 작은 삼거리다. 왼쪽 화장실 앞으로 내려가는 길은 공사 중이다. 오른쪽 좋은 길로 간다. 해안도로가 언덕 아래로 보인다. 산모퉁이를 돌아 북한까지 뻗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