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대지진 고비에도…에르도안 '국뽕 카드' 먹혔다

by김상윤 기자
2023.05.29 16:46:53

[이데일리=김상윤 기자] ‘권위주의와 민족 우선주의가 튀르키예 경제난, 대지진 여파를 이겨냈다.’

튀르키예 대선 결과는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지난 2월 튀르키예 남부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5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최악의 경제난이 이어졌지만, 튀르키예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호소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소위 ‘국뽕 전략’이 먹혀들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튀르키예 대선에서 정통 경제정책, 의회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열망은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에 대한 노골적인 호소에 가려졌다”면서 “국가 안보에 대한 불안은 안정을 내세운 에르도안 대통령을 선택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이스탄불의 키시클리 지역에서 대선에서 승리한 후 관저 앞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사진=AFP)
28일 오전(현지시각) 튀르키예 선거관리위원회인 최고선거위원회(YSK)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대선 결선투표 승리를 공식 발표했다. 개표율 99.99% 기준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정의개발당)이 52.16%, 경쟁자였던 야권 공동후보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후보(공화인민당)는 47.8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최종 개표 결과는 6월1일 공식 발표된다.

결코 에르도안 대통령에 유리한 선거는 아니었다. 지난 2월 튀르키예 남부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5만명 이상이 사망했고, 신속한 대응에 실패했다는 비판에 거세지면서 ‘에르도안 정권은 끝났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경제 성적표는 낙제점에 가까웠다. 튀르키에는 지난해 10월 기준 전년 대비 85%가 넘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리라화 가치 폭락으로 경제 파탄 직전까지 갔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경제 심판론’을 내세우며 지지율을 끌어 올렸다.

실제 선거 전 여론조사는 에르도안 대통령에 불리했다. 여론조사기관 폴리트프로(Politpro)가 대선 직전 30일간 시행한 설문 결과를 종합하면 클로츠다로을루 후보(48.9%)가 에르도안 대통령(43.2%)을 5%포인트 앞섰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1차 투표에서 49.52%의 득표율로 44.88%의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5%가량 격차를 내며 1위에 올라섰다. 과반에 못 미치며 결선에 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승패는 에르도안 대통령에 기울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변화를 원하는 청년층과 달리 50대 이상 중장년층에서는 여전히 안정을 원하고 있고, 에르도안 대통령이 선거 막판 저소득층을 겨냥한 선심성 공약을 쏟아냈던 점이 주효했다. 정년 요건 폐지로 조기 연금 수령을 가능하게 하고 최저임금과 공공 근로자 보수를 대폭 인상하고, 한 달간 가정용 가스를 무상 공급하는 공약을 쏟아냈다. 장기 집권을 통해 사실상 언론을 장악하면서 유리한 선거 환경이 마련된 것도 도움이 됐다. ‘국경없는기자회’는 지난달 국영방송 ‘TRT뉴스’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보도한 빈도가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의 60배에 달했다고 분석했다.



결정타는 1차 투표에서 득표율 3위(5.17%)를 기록한 시난 오안 승리당 대표의 지지였다. 오안 대표는 집권 여당에 힘을 실어주는 게 튀르키예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며 지지층에게 에르도안을 선택해달라고 요청했고,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 그는 쿠르드족 분리독립 투쟁에 대한 무관용과 난민 송환을 요구했고,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를 일부 수용하면서 ‘딜’이 이뤄졌다.

에르도안 대통령 재선을 환호하는 지지자들 (사진=AFP)
특히나 에르도안 대통령의 강력한 권위주의 및 민족 우선주의는 대다수 튀르키예 국민을 사로잡았다는 평가다. 그는 불리한 판세가 지속하자 튀르키예 최대 안보 위협으로 쿠르드족을 제물로 삼았다. 그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 등 야권이 쿠르드족의 분리독립을 추진하는 테러 세력과 결탁했다며 유권자들의 민족주의와 안보 불안감을 자극했다. 반면 자신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속에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며 튀르키예의 위상을 높이고 국익을 키운 리더로서 이미지를 강조했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내세운 ‘경제 심판론’은 국가안보 불안에 가려졌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면서 ‘21세기 술탄’ 자리를 확고히 했다. 술탄은 튀르키예 전신인 오스만제국의 황제이자 이슬람 종교 지도자를 겸한 절대 군주로, 에르도안 대통령이 자신을 지칭하는 수식어로 활용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각종 스캔들과 부패, 반정부 시위, 쿠데타 위기를 겪었지만 강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늘 극복했다. 49세에 2003년 내각책임제 당시 총리에 오르면서 튀르키예의 최고 권력자가 됐고, 연이은 총선 승리로 3선 총리를 지냈다. 총리 퇴임 이후 법상 4연임이 불가능해지자 2014년 튀르키예 사상 최초의 직선제 대선을 통해 대통령이 됐다. 2017년에는 대통령에게 부통령 및 법관 임명권, 의회 해산권, 국가비상사태 선포권까지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헌법 개정도 이끌어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임기 도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승리하면 추가 5년 임기를 보장한 헌법에 따라 2033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현재 69세인 그가 79세까지 집권할 길이 열려 사실상 종신 집권이 가능한 셈이다.

이슬람 정치 컨설턴트 걸펨 사얀 산버는 뉴욕타임스에 “에르도안은 이번 재선에 승리하면서 궁극적인 자심감을 얻었고, 패배는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야당에 대해 더욱 가혹한 정치를 펼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