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 Crisis)⑥안도와 불안 교차하는 월스트리트

by피용익 기자
2009.09.09 11:45:03

<1부> 몰아치는 변화의 물결
금융인들 자신감 바닥..고급빌딩도 헐값에 임대
"2차 위기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긴장감 여전

[뉴욕=이데일리 피용익특파원] "경제가 안정되는 신호가 나타나고 있지만 월가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가장 큰 변화는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월가 사람들이 자신감을 잃었다는 것이지요".

지난해 베어스턴스에서 해고된 리서치 애널리스트 스코트(가명·36)씨는 금융위기 1주년을 맞은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금융위기 발생 2개월만에 해고된 후 수개월 간의 구직 활동 끝에 올해 초부터 작은 투자회사에서 리서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올 들어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면서 함께 해고된 다른 동료들도 상당수는 일자리를 찾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과거의 위풍당당하던 월가 금융인들의 모습은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리먼 사태의 충격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얘기다. 

스코트 씨는 "위기가 끝났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며 "은행들은 여전히 부실을 안고 있고, 월가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고 말했다.


▲ 맨해튼 7번 애비뉴 바클레이즈 본사. 리먼브러더스 본사였던 이 건물은 지난해 9월 리먼이 파산하자 리먼을 인수한 바클레이즈로 넘어갔다.(사진=피용익특파원)
리먼브러더스 파산 1주년에 즈음해 방문한 맨해튼 7번 애비뉴 745번지 건물에는 푸른색 바클레이즈 전광판이 번쩍이고 있었다. 불과 1년 전 붉은색 리먼브러더스 전광판이 거리를 밝히던 바로 그 건물이다.

지난해 9월15일 리먼브러더스는 챕터11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직원들은 종이박스에 개인 짐을 챙겨 하나둘씩 이 건물 사무실을 떠났다. 스코트 씨를 비롯한 맨해튼의 금융인들은 측은한 눈빛으로 이들을 지켜봤다.

그러나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서막에 불과했다. 리먼브라더스 파산에 이어 베어스턴스, 메릴린치까지 줄줄이 무너져 내렸다. 지난 1년 동안 월가에서는 2만여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변한 것은 옛 리먼 본사 건물만이 아니다. 맨해튼 남쪽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에 위치한 월가에는 건물마다 사무실을 임대한다는 광고가 걸려 있었고, 근처 레스토랑과 스포츠클럽에는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빈 자리가 더 많았다.

▲ 월가 고급 빌딩에 내걸린 임대 광고.(사진=피용익특파원)
자신을 마이클이라고 소개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작년에 비해 임대료가 20% 가량 낮아진 상태"라고 강조하면서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내에 3300평방피트(약 306평방미터) 짜리 사무실을 월 1만달러 미만에 임대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그는 "1~2명이 일하는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면 월 2000달러 아래로도 몇개의 사무실을 확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상업용 부동산 중개업체인 존스랭라살은 월가가 위치한 맨해튼 남부의 사무실 공실률이 내년 20%에 달할 것이라고 최근 전망했다. 빈 사무실이 지금보다도 두 배 가량 늘어날 것이라는 의미다.

대중지 메트로는 뉴욕판 신문에서 이같은 전망을 전하면서 "예술가들도 월가에 작업공간을 얻을 수 있게 됐다"고 비꼬기도 했다.


베어스턴스에서 해고된 스코트 씨의 말처럼 금융위기가 끝났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고 볼 수 있더라도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는 데 이견이 없다.

막대한 공적자금을 받은 대형 은행들의 수익성이 회복되고 있는 반면 중소형 은행들의 파산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월가 표지판 사이로 보이는 고층 건물들.(사진=피용익특파원)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따르면 올 들어 파산한 은행 수는 89개에 달한다. 이는 1990년대 초반 이후 가장 많은 숫자다. 이 가운데 지난달 콜로니얼뱅크의 파산은 미국 역사상 여섯번째로 큰 은행 파산이며, 올들어 최대 규모다.

특히 상업용 부동산 문제는 은행 파산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며 제2차 금융위기의 우려를 높이고 있다. 부동산 가격 하락세가 지속되면서 대출자들의 자금 사정은 계속 어려워지고, 이는 연체와 채무불이행으로 이어져 은행들의 회계장부를 더럽히고 있다.

앞서 지난 7월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은 상원 은행위원회 청문회에서 경기회복에 대해 대체로 낙관하면서도 "상업용 부동산 대출 문제는 경제에 어려운 과제로 떠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경제지표의 개선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 역시 안도하기는 이르다. 무엇보다도 미국 경제의 70%를 차지하는 가계소비 위축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소비의 출발점인 고용은 빠른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지난달 미국의 실업률은 9.7%를 기록했다. 26년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처럼 리먼브러더스가 붕괴된 후 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국 경제에 드리운 그림자는 완전히 걷히지 않은 모습이다. 안도와 불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월가에 긴장감이 계속 감돌고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