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이종석 기자
2005.05.26 12:40:20
무자본, 무경험, 무기술로 이룩한 개발연대의 기적
30년만에 세계 5위 철강대국 입성
[edaily 이종석기자] KISA가 와해되자 박정희는 중대 결정을 내렸다. 69년 5월22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 박충훈 부총리, 김정렴 상공장관, 박태준 포철 사장 등을 불러 모은 가운데 제철소 건설과 관련한 일대 방향전환을 지시한다.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을 외국기관에게 일임한 채 결과만을 기다리는 자주성 없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 자체의 안을 만들어 외국투자기관을 설득하라”는 것이었다. 국가 중대사안의 성패를 외국기관의 결정에 맡겨두는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자주적이고 현실성 있는 독자개발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였다.
◇ “KISA 안대로 추진했다면 부실기업 됐을 것”
박 대통령은 이로부터 열흘 후 박충훈 부총리를 경질하고 김학렬 경제수석을 후임 부총리로 임명하는 개각을 단행한다. 추진력 강하고 개성이 뚜렷한 김 부총리를 내세워 포항제철 건설에 힘을 쏟겠다는 통치권자의 의지 표현이었다.
김 부총리가 취임하면서 곧바로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사업계획 연구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장은 정문도 기획원 운영차관보가 맡았으며,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김재관 박사 등 13명의 철강전문가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는 한달 반에 걸친 연구작업을 거쳐 7월22일 255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보고서는 연 100만톤 규모의 조강 생산능력을 갖춘 종합제철 공장을 72년까지 완공하고, 이를 최단 시간내에 200만톤 규모로 늘린 다음 최종적으로 연산 500만톤 규모의 대단위 제철소로 확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포항제철 건설은 KISA와 결별하고 독자 건설방안을 만들면서 부터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오원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KISA안대로 추진했더라면 포항제철은 결국 부실기업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회고했다. 설비수출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KISA 참가업체들이 한국 상황을 도외시한 채 구상한 연산 60만톤 규모의 제철소로는 채산성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라”
KISA를 통한 차관공여가 실패하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 일본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당시 일본이 한국에 주기로 한 대일청구권 자금이 있었는데 이중 농림수산 분야 자금을 제철소 건설 자금으로 전용하자는 발상이었다.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 아이디어는 박태준 사장이 처음 제기한 것으로 포철 2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외자도입을 위해 미국 코퍼스사를 방문했다가 절망적인 답변을 받고 귀국길에 오른 박 사장이 ‘대일자금 전용’ 아이디어를 떠올리고는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동경에 도착한 박 사장은 일본 철강연맹 이사장인 이나야마 야하다제철 사장과 나가노 후지제철 사장 등 일본 제철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한국 제철소 건설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귀국 후 박 사장은 박 대통령을 만나 이 같은 상황을 보고했다. “KISA를 통한 차관도입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대안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 길 밖에 없다”
이제 제철소 건설을 위한 자금조달 및 차관교섭 대상은 일본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미국의 냉담한 반응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정부 관료들도 다시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정부는 종합제철사업계획연구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를 기반으로 일본에 대한 입체적인 설득작업에 착수했다.
일본에 대한 설득 작전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일본 재계와 철강업계는 박태준 포철 사장이 맡고, 일본 정부와의 합의 도출은 김학렬 부총리가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처음에 일본 정부는 청구권자금 전용에 대해 경제적 타당성과 재정상태 등을 이유로 난색을 표시했다. 특히 통산성은 한국에 제철소를 건설할 경우 향후 자국과 경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69년 8월6일 박태준 사장은 정문도 기획원 차관보와 함께 실무교섭단을 이끌고 다시 일본 방문길에 올랐다. 민관합동으로 일본 설득에 나선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후 군비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12만톤 규모의 야하다 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채산성을 문제삼지 않았다. 일본은 1인당 국민소득이 50~60달러일 때 제철소를 시작했는데 한국은 지금 200달러에 육박하니 못할 것도 없다” 교섭단은 일본 정계와 재계의 실력자들을 만나 집요하게 설득했다.
마침내 일본 정부는 8월22일 각의를 소집하고 26일 개막되는 한일 각료회담에서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에 협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민관 합동 설득작전이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해 12월 김학렬 부총리와 주한 일본대사간에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한일 기본협약이 체결됐다. 내외자 2억달러를 들여 103만톤 규모의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며, 외자 1억2370만달러 중 청구권 자금으로 7370만달러, 일본 수출입은행 차관으로 5000만달러를 각각 조달한다는 내용이었다.
해방 이후 번번히 실패해 온 제철소 건설 사업이 다섯번째 시도 끝에 결국 일본 자금 유치로 그 해법을 찾은 것이다. 자금확보 미비로 지지부진했던 포항제철 건설 작업은 다시금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 “신기루가 현실로…“
70년 4월1일 마침내 포항제철 1기 설비가 착공되고, 3년 후인 73년 6월9일 첫 화입식(火入式)이 거행됐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용광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이후 제선 제강 압연 등 총 22개 공장 및 설비로 구성된 종합제철 일관 공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73년 7월3일 마침내 포철 1기 설비가 종합 준공됐다. 무자본과 무경험, 무기술 상태에서 허허벌판을 현대식 제철공장으로 탈바꿈시킨 “영일만 신화”였다. 연인원 581만명이 동원됐고, 건설자금은 경부고속도로의 3배에 해당하는 1205억원이 투입됐다.
“신기루가 현실로 승화한 것이 포항종합제철이다” 정문도 당시 기획원 차관보(포철 건설추진위원장)는 포철 건설의 감회를 이렇게 표현했다. 건설자금 조달을 위해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애간장을 녹이던 차관교섭단의 일원으로서, 허허벌판에 모습을 드러낸 포항제철의 위용은 마치 신기루처럼 보였을 법도 하다.
포철 건설 당시 직원들 사이에는 이른바 “우향우 정신”이 주입되어 있었다고 한다. 만약 실패하는 날에는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앞바다에 빠져 죽을 각오로 일하자는 것이었다. “민족의 목숨 값이라 할 수 있는 대일청구권 자금이 건설재원인 만큼 실패하면 사표가 아니라 죽음으로 사죄한다”는 각오였다.
이 같은 각오로 뭉친 초기 경영진과 근로자들의 사명감은 오늘날 포철을 세계 최고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정신적 밑거름이 됐다.
포철은 이후 포항제철소 2~4기, 광양제철소 1~4기, 광양 5고로 증설 등 끊임없이 설비를 확장하며, 한국을 세계 5위 철강대국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담당한다. 73년 45만톤이던 조강생산량은 2004년 3020만톤을 넘어서 무려 70배 이상 늘어났다.
포철 건설 이후 우리나라는 기초소재 산업과 중화학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2단계 도약기를 맞게 된다. 포철은 그 자체로 한국 경제개발의 초석이자 동시에 금자탑이었던 셈이다.
("한국경제 반세기"는 매주 화, 목요일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