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포크로 찔러 죽인 아들 이야기, 연극이 될 수 있을까

by장병호 기자
2023.07.20 10:25:08

존속살해 다룬 연극 ''테베랜드'' 국내 초연
세르히오 블랑코 희곡, 신유청 연출 무대화
진실과 허구의 모호함 속 지적 자극 담아
이석준·정희태·길은성·이주승·손우현·정택운 출연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한 청년이 아버지를 살해했다. 늦은 새벽,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잔소리를 하자 아들은 아버지를 포크로 21번이나 찔러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반나절 동안 아버지의 시체와 함께 지낸 뒤, 오후가 돼서야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신고했다.

연극 ‘테베랜드’의 한 장면. (사진=쇼노트)
신문 사회면에 실린 기사라면 끔찍한 흉악 범죄로 여겨졌을 이야기다. 물론 실화는 아니다. 현재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 중인 연극 ‘테베랜드’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테베랜드’는 우루과이 출신 극작가 세르히오 블랑코의 작품. 공연제작사 쇼노트가 국내 초연으로 지난달 28일부터 선보이고 있다.

작품은 이 끔찍한 사건이 한 편의 연극이 돼가는 과정을 그린다. 주인공은 극작가 ‘S’. 존속살해를 주제로 한 작품을 준비 중인 S는 집필을 위해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수감 중인 마르틴을 만난다. S는 무대 위에 철창을 설치해 마르틴을 직접 무대에 올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주변의 반대로 계획은 무산되고, 대신 마르틴을 연기할 배우 페데리코를 섭외해 작품을 만들어간다.

제목 속 ‘테베’는 고대 그리스 국가의 이름이다. 테베의 왕은 바로 오이디푸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뒤 진실을 알고 자신의 눈을 뽑아버린 오이디푸스 신화는 ‘테베랜드’의 중요한 모티브다. 여기에 작품은 존속살해를 다룬 또 다른 고전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리고 프랑스의 수호성인이자 신앙의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던 성 마르틴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엮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연극 ‘테베랜드’의 한 장면. (사진=쇼노트)
무대 위 대형 철창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이는 극 중 마르틴이 수감돼 있는 교도소이자, 동시에 S가 무대에 세운 철장 세트를 상징한다. 철창 위에는 다섯 개의 모니터가 설치돼 있고, 철창 안에는 벤치와 농구 골대, 책상 등이 놓여 있다.

관객은 처음엔 이 철창을 마르틴이 갇혀 있는 교도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극이 전개되고, 마르틴 역의 배우가 페데리코 역을 동시에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철창이 교도소인지 연극 무대인지 헷갈리게 된다. S라고 표현된 작가의 이름은 극 중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S라는 이름이 실제 작가 세르히오 블랑코(Sergio Blanco)에서 따온 것임을 미뤄 짐작하게 된다. 그래서 이 공연이 세르히오 블랑코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닌지 의심까지 생긴다.

이 모호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테베랜드’에 대한 감상은 달라질 것이다. 관객 입장에선 무엇이 진실이고 허구인지 헷갈린다. 프로그램북에 실린 신유청 연출의 인사말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이 작품의 대본을 접한 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존재론적 질문인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를 떠올렸다고 털어놨다. 신 연출은 “존재론적인 질문은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도 품는 질문이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사치로 여겨진다”며 “그렇기에 나는 세르히오 블랑코의 ‘테베랜드’가 우리 사회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선물로 여겨진다”고 적었다. “잃어버린 근원적인 물음을 우리 안에 복기시킨다”는 뜻에서다.

한 번 보고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신화, 철학, 종교, 심지어 스포츠까지 다양한 테마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적인 자극을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공연 시간도 쉬는 시간을 포함해 170분에 달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가 시간을 잊게 한다. 배우 이석준, 정희태, 길은성이 S 역, 배우 이주승, 손우현, 정택운이 마르틴·페데리코 역으로 출연한다. 공연은 오는 9월 24일까지 이어진다.

연극 ‘테베랜드’의 한 장면. (사진=쇼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