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환의 크레딧스토리)골리앗의 재무정책

by윤영환 기자
2005.12.29 14:04:57

[이데일리 윤영환 칼럼니스트] 얼마 전 금융감독 당국은 기업들에게 숨겨진 부실을 돌아오는 결산시점까지 모두 정리할 것을 `호소`했다. 증권집단소송제가 본격 적용되는 2006년 벽두부터 당장 칼 바람이 불까? 사실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다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거나 "빨간 신호등이라도 모두 함께 건너면 두렵지 않다"는 식의 접근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고도 성장기에는 편법적이거나 변칙적인 재무정책이 필요악일 수 있다. 다윗이 골리앗과 승부하기 위해서는 정공법보다 편법과 변칙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골리앗의 재무정책은 달라야 한다. 골리앗이 작은 효율에 집착하면 균형과 안정을 잃는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구축하는 계기가 된 것은 1805년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였다. 넬슨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전력의 열세를 탁월한 정보력과 기동력으로 극복하고 화력을 집중하여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를 섬멸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이다. 이후 영국은 해양패권을 장악하여 대서양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주요 거점을 모두 확보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판의 승부가 가져다 준 전리품은 아니었다. 대영제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1889년의 `솔즈베리 해양방어법`을 보아야 한다. 이 법은 영국이 그 다음으로 강력한 두 나라의 해군력을 합친 것보다 우세한 압도적인 해군력을 보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물론 솔즈베리법은 새로운 정책이 아니라, 이미 확고한 위치에 있던 영국 해군력의 절대 우위를 더욱 강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층 강화된 모습으로 현재 미국 국방정책의 기본정신이 되고 있다.

골리앗의 전략은 다소의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항상 압도적인 역량을 유지하는 것이다. 트라팔가 해전과 같은 짜릿한 승리를 꿈꾸는 적은 절대로 정공법을 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작은 약점을 파고드는 수많은 다윗들의 편법과 변칙에 모두 대비해야 하는 것이 골리앗의 숙명이다. 

효율의 관점에서 보자면 골리앗의 전략은 헛점이 많을 수 있다. 골리앗의 그런 비효율이 싫다면 답은 한가지뿐이다. 수 많은 다윗의 하나로서 그저 눈치껏, 부지런하게 그리고 피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골리앗과 다윗을 세세한 효율의 관점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지배적 또는 지도적 지위가 안겨주는 이익이 그 만큼 막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다윗이 골리앗을 꿈꾸는 것이다.



기업 이야기로 돌아오자. 세계적인 대기업을 꿈꾼다면 효율 이상의 압도적인 역량을 가져야 한다. 주력제품의 절대적인 경쟁지위와 같은 사업효율성과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은 어느 다윗이나 보유하는 기본요건이다.



골리앗은 이에 더하여 풍부한 여유자금과 우량한 자금조달구조 등의 재무 안정성은 물론이고 금융시장과 시민사회의 지지까지 확보해야 한다. 아니 오히려 금융시장과 시민사회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골리앗의 길이다.

오늘날 우리 대기업들은 다윗의 단계에서 하나씩 경쟁자를 물리쳐가면서 어느덧 골리앗의 반열에 다가서고 있다. 그러면서 많은 기업들이 본능적으로 골리앗의 전략을 깨쳐가고 있다. 세계적 일류기업과 싸우고 벤치마킹하면서, 그리고 국제금융시장과 접촉하면서 알게 모르게 한 차원 높은 새로운 질서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재무정책으로만 국한해보더라도 대규모 현금성자산 보유와 초장기 자금조달, 해외조달 확대 등이 어느덧 일반적 현상이 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금융시장과 언론의 인식수준은 아직 골리앗을 따라가지 못하고 다윗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자기보다 커 버린 자식을 아직도 품 안의 자식으로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니라면 대규모 현금성자산 보유를 기업가 정신의 쇠퇴로 섣불리 매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걱정해야 할 대상은 좀처럼 품 안을 떠나지 않으려는 마마보이들과 아직은 어설픈 골리앗들의 좌충우돌이다.

다윗의 짜릿한 승리에 취해 좀처럼 골리앗의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는 마마보이 기업들도 일부 보인다. 수조원대의 외형을 가지고도 여전히 천억원 수준의 셈법에 의지하는 기업들이다. 글로벌 경쟁환경이 조금만 어려워져도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정부의 정책적 보호에 의지하려 하고, 여전히 금융편중과 단기자금 과잉의존이 주는 단기 효율성의 단맛에 푹 빠져 있는 기업들이다.

마마보이의 폐해는 의외로 크다. 환경변화에 대한 대응력을 키우지 못해 자칫 국민경제에 부담을 안기는 것도 문제지만, 이들의 어설픈 집착 때문에 수많은 다윗들이 도전의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엄마 품은 매우 제한적인 자원이고, 우리에게는 항상 더 많은 다윗들이 필요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더욱 절실한 것은 바로 다윗이다.

한편 우리의 젊은 골리앗들은 아직 어설프다. 체격은 커졌는데 사회적 관계수립에는 아직 서툰 사춘기의 모습이다. 골리앗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금융시장과 시민사회의 공고한 안정과 든든한 지원이 필수적이다. 물론 우리 금융시장과 시민사회가 골리앗의 덕을 보려면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한다. 하지만 골리앗도 스스로 금융시장과 시민사회에 다가서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마무리 삼아 12대 300여년 동안 만석지기의 부를 유지한 경주 최부자집의 6가지 가훈을 소개하고자 한다. 절제와 사회적 책임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여유로움보다는 어떤 비장함과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

“과거를 보더라도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 땅을 사지 마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윤영환/굿모닝신한증권 기업분석부 연구위원/Credit analy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