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뜩이나 금리 역전인데…커지는 자본 유출 공포

by김정남 기자
2018.03.25 15:27:50

[누구를 위한 무역전쟁인가]②
철강·IT·자동차 등 주력 업종 제재 우려
반도체까지 美 무역제재 확대될지 촉각
수출 둔화하고 원화 약세 지속되면…
금리역전 상태서 자본유출 우려 커질듯
"외부 충격에 강한 경제 구조 구축해야"

[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이데일리 김정남 김정현 기자] KB증권 리서치센터는 최근 국제통상 전문가로 꼽히는 한국무역협회의 제현정 박사를 찾아 비공개 토론을 했다. 주제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규제 영향.

주목되는 몇 가지 포인트가 있었다. 첫 손에 꼽힌 게 어떤 한국 산업이 규제의 대상이 될지 였다. 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 가지 조건을 가진 산업이 규제를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첫째, 대미(對美) 무역 흑자가 많은 산업입니다. 최근 미국 수출이 급증하고, 미국 내에 경쟁 기업이 존재하는 업종도 그렇습니다.” 이 중 두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산업이 철강, 정보통신(IT), 자동차, 화학, 산업기계다. 이를테면 미국이 최근 3년간 낸 무역 적자 중 60% 가까이는 IT, 자동차, 기계 부문(정보제공업체 CEIC)에서 나왔다. 이들 업종은 추가 규제가 있을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같이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 품목이다.

특히 관심인 게 반도체로 확대 여부다. 반도체는 최근 우리 경제를 홀로 먹여살리다시피 하고 있다. 남대종 KB증권 IT담당 연구원은 “만에 하나 낸드플래시로 만들어지는 저장장치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등의 수입이 금지된다면 우리나라 반도체 업체는 악영향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다.

또다른 포인트는 미국의 주요 교역국인 독일과 일본에 대한 제재는 왜 미미한 지다. 지난해 독일과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각각 643억달러, 688억달러 무역 흑자를 냈다. 우리나라(229억달러)보다 세 배 정도 더 많다.

제 박사는 “독일은 유럽연합(EU)에 속해있기 때문에 단독으로 제재를 가하기 쉽지 않다”며 “일본은 가전 등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측면이 있어 민감도가 낮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타깃인 중국과 산업 구조가 비슷한 데다, 정치적인 발언권도 주요국보다 세지 않은 게 냉정한 현실이다.

이 토론회는 무역전쟁 충격이 만만치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우리 수출이 직접 타격 받을 가능성이 우려된다. 미국이 우리나라를 강하게 압박하는 와중에 보호무역으로 세계 교역량까지 급감하는 두 개의 충격이 동시에 닥칠 수 있는 탓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추정 결과를 보면, 전세계 평균 관세율이 1%포인트 높아질 경우 세계 교역량은 평균 0.48% 감소한다. 이는 곧 국내 수출 둔화 요인으로 작용하며,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 실물경제 전반에 충격을 줄 수 있다. 지난해 수출의 경제 성장 기여율은 64.5%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성장률 3.1% 중 2.0%포인트는 수출 덕이었을 정도로 절대적인 비중이다.

일각에서는 1930년대 악몽 같았던 대공황의 기억도 회자되고 있다. 경기가 정점이었던 1929년 6월 이후 3년간 세계 교역량은 31% 급감했기 때문이다.

실물경제 뿐만 아니다. 금융시장도 자본 유출 우려가 부쩍 커지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 조건은 △금리 차이 △통화가치 차이 △펀더멘털 차이 등이다. 이 중 금리는 이미 미국과 역전된 상태다. 그런 와중에 수출 둔화로 펀더멘털이 악화하고 경기 불확실성에 원화 가치가 하락할 경우 외국인이 한국물 자산에 투자할 유인이 작아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마켓포인트에 따르면 G2 무역전쟁 공포가 엄습한 지난 23일 원화는 주요 통화들과 비교해 최대 폭 하락했다. 원·달러 환율은 1082.2원(9.5원↑)에 마감했는데, 이는 원화 가치가 0.9% 폭락한 것이다.

같은 시간 주요국 통화는 강세를 보이거나 거의 변동이 없었다. 23일 장 마감께 일본 엔화 가치는 1.1% 상승했고, 유로화 가치는 0.05% 하락하는데 그쳤다. 신흥국 통화의 하락 폭도 원화에 한참 못미쳤다. 호주 달러화는 0.4% 내렸고, 대만 달러화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는 각각 0.1%, 0.3% 하락했다. 무역전쟁 당사자인 중국의 위안화 가치(0.1%↓)도 큰 변동이 없었다.

김두언 하나금융투자 선임연구원은 “시장은 중국이 무역전쟁에 대한 대응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며 “우리나라가 중국과 경제적으로 가장 연동돼 있고 원화는 위안화의 대체 통화로 여겨지다보니, 위안화 대신 원화로 불똥이 튀었다”고 분석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무역전쟁으로 원화 약세가 지속돼 환율이 상승한다면 금융시장에 교란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신 교수는 “환율이 상승해 자금이 나가면 다시 환율이 오르고, 그러면 또 자금이 유출되는 악순환 가능성이 무서운 것”이라며 “금리가 역전된 상태여서 불안감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