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머리의 창시자 비달 사순 사망

by뉴시스 기자
2012.05.10 10:55:59

[로스앤젤레스=AP/뉴시스] 틀어올린 머리와 뜨거운 롤러로부터 여성들을 해방시킨 헤어스타일의 혁명가 비달 사순이 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현지 경찰대변인이 발표했다. 사순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으며 신고를 받은 경찰이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임을 확인했다고 그는 말했다.

비달 사순이 남성 미용사로 첫 등장했던 1950년대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은 틀어올려서 이리저리 큼직하게 쌓아올리고 핀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유행했고, 머리 무게만 해도 상당했던 시대였다.

비달 사순은 1960년대 가위 하나로 여성들의 머리를 간편하고 특별한 모양내기가 필요없을 만큼 제자리에 척척 들어맞도록 커트를 함으로써 당시 막 태동하던 여성해방 운동과 함께 여성계를 열광시키며 세계적인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비달 사순은 창의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로 타이밍도 아주 완벽했지요.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이 해방되면서 여성의 삶도 해방되기 시작했으니까요"라고 ''얼류어''지 편집장 린다 웰스는 말했다.

비달 사순의 오랜 친구이며 함께 존 폴 미첼 시스템이란 회사를 창업했던 CEO 존 폴 데호리아도 "비달 사순은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헤어스타일리스트다. 좋은 헤어스타일은 죽지 않는다. 비달 사순과 폴 미첼의 회사도 영원히 성업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달 사순은 1954년 고향인 런던에서 첫 미용실을 열었지만 오직 커트만을 연구하고 시행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였다. 하지만 일단 ''적시고 자르면 끝''인 그의 컨셉이 대 히트를 기록하자, 전세계의 수많은 여성들이 머리를 곱슬거리게 만드는 롤러 세트와 영원히 결별했다.

사순의 커트 머리는 미니스커트를 유행시킨 영국의 스타 패션디자이너 메어리 퀀트의 스타일의 중요한 일부이기도 했다.

"내 아이디어는 머리털을 마치 직물처럼 디자인 재료로 사용하고, 그 밖의 다른 피상적인 장식은 일체 배제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1993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여성들은 당시 일터로 복귀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권리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였다. 모두 바빠서 아무도 드라이어 밑에 앉아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비달 사순의 커트 머리로는 단발머리, 5포인트 커트,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서 힌트를 얻은 짧고 헝클어진 스타일의 ''그리스 여신'' 스타일 등이 모두 히트를 했다.

사순의 동업자 폴 미첼의 아들 앵거스 미첼은 사순의 제자로 현재 그들의 사업체 존 폴 미첼 시스템의 공동대표이다. 그 자신도 유명 헤어스타일리스트로 사순의 단순하고 박력있는 커트 스타일을 전 세계에 복제, 배포하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비달 사순은 미용계의 콜럼버스입니다. 커트 머리를 가지고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알아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으니까요."하고 그는 말했다. 실제로 매디슨 애비뉴에서 유명인사들 전용 스타일리스트로 헤어샵을 운영하고 있는 오스카 블란디 같은 사람도 "비달 사순의 단순한 예술성에 감동해서 이 사업을 좋아하게 됐고, 헤어스타일 사업에 뛰어들게 됐다"고 말한다.

사순은 1968년 영화 ''로즈마리 베이비''에 출연하는 미아 패로우의 커트 머리를 위해 런던에서 헐리우드까지 비행기로 불려와 당시로선 기록적인 금액인 1회 5000달러를 받는 등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그의 사업은 영국을 넘어 미국과 세계 각지로 확장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샴푸 등 헤어 제품과 간편한 헤어스타일링 기구들도 시장을 지배했다. 자신의 이념과 기술을 가르치는 비달 사순 아카데미를 영국과 미국, 캐나다에 설립해 후진을 길렀고, 독일과 중국 등 다른 지역에서도 사순의 학교 유치를 계획하고 있다.

사순은 "헤어스타일은 길든 짧든 한 여성의 골격에 맞춰 제대로 잘라줘야 한다" "가위를 들고 머리통 위의 헤어스타일을 마무리하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다" "짧은 머리는 그 여성의 나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여성의 심리 상태를 말해준다"는 등의 명언을 많이 남겼고 자선사업에도 앞장 섰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부인''(1968) ''비달 사순 자서전''(2012) 등 자서전을 남겼고 그의 네 번의 결혼으로 얻은 부인 중 가장 유명한 비벌리 사순도 ''비달 사순식으로 커트하기''(1984) 등 저서들을 출간했다.

14살 때 어머니로부터 "너는 가난하니 미용사가 돼라"는 말을 들었던 런던 토박이 소년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에 자원했다가 돌아온 후로 가위를 들고 자신의 꿈을 실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