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小學) 읽고 새끼 꼬고 사과 따고… 이게 바로 ''시골맛''

by조선일보 기자
2009.10.15 12:00:00

[조선일보 제공] 과일 따고 시골집서 묵고 낚시한 고기를 먹는 건강함, 바라보기만 하는 관광이 아닌 체험 여행이 주는 즐거움입니다. 주말매거진이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캠페인과 함께 6회에 걸쳐 주한외국인과 함께 하는 '방방곡곡 체험여행'을 연재합니다.

"이걸 둘로 나눠서, 이렇게 사아아 돌리고 당기고 또 둘로 나누고…."

깔깔한 짚자리 위에 '짚신 할아범' 유충국(69)씨가 새끼 꼬기 시범을 보인다. 무릎을 꿇고 앉은 비앙카 모블리(20)씨와 언니 레슬리(22)씨는 손바닥 사이에 볏짚을 넣고 살살 비볐다. 모블리 자매의 손안에서 노란 짚이 꼿꼿하게 버티고 앉았다.

"요래, 요래, 돌리면 된다. 그게 안 되노. 새끼 못 꼬면 아무것도 못 만드는데…." "아이구, 잘 몬하겠어요. 생각보다 어려워예."

▲ 짚풀 공예장에서 구입한 5000원짜리 미니 짚신. 비앙카씨의 머리끈이 됐다.

KBS 토크쇼 '미녀들의 수다'에서 깜찍한 부산 사투리로 인기를 끄는 미국 뉴욕 출신 비앙카(연세대 비교문학과)씨와 언니 레슬리(연세대 어학당)씨는 지난 9일 경북 영주 순흥면 선비촌에서 초보 농촌 아가씨가 됐다. 비앙카씨 자매의 국적은 미국인이지만 어머니가 부산 출신 한국인이어서 한국말을 꽤 잘한다.


선비촌(입장료 3000원, 소수서원까지 관람 가능)은 영주의 유서 깊은 한옥을 재현한 '선비 체험 마을'이다. 한옥들은 낮엔 전통문화 체험장으로, 밤이면 숙박 장소로 쓰인다. 나무공예, 한지공예, 사군자 그리기 등을 가르치는 '체험 선생님'은 동네 어르신들이다. 매표소에서 체험 별로 5000~1만원인 '체험 티켓'을 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옛 문화를 즐기면 된다.

"부생아신하시고 모국아신이러라(아버지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부생아신하시고 모국아… 아이고 잊어버렸어요, 하하."

유생(儒生)들이 입는 도포를 입고 '훈장님' 이재룡(62)씨의 말을 따라 '좋은 말씀'을 읽는 서당체험(예약 필수)을 마친 자매는 마을과 연결된 소수서원으로 향했다.

▲ “부생아신하시고 모국아신이어라…”경북 영주 선비촌에서‘훈장님’말씀 따라 사자소학을 읽는‘미녀들의 수다’출연자 비앙카 모블리(오른쪽)씨와 언니 레슬리씨. 선비 문화 체험 마을인 선비촌에선 서당 체험(예약 필수) 외에 사군자 그리기, 짚풀 공예, 부채 만들기 등을 즐길 수 있다.



"1000원짜리 지폐에 누가 그려져 있죠? 바로 그 이황 선생님이 이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가르치셨어요.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사립대학이지요."



권순옥 문화관광해설사의 목소리에 처마 끝에 앉았던 참새 한 쌍이 솔숲으로 쪼로로 날아간다. 오랜 한옥 사이를 걸으니 평생 부지런히 학문을 닦았던 옛 선비들의 맑은 정신이 울리는 듯하다. 길게는 1000년 넘게 서원을 지킨 적송(赤松)이 모인 숲은 건강한 청년의 튼튼한 팔뚝처럼 기개가 넘친다.

소수서원에서 차로 10분쯤 가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무량수전(無量壽殿·1016년)이 있는 부석사(입장료 1200원)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1㎞ 남짓한 길을 올라가는 사이 소백산맥의 온화한 능선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국립박물관장이었던 고(故) 최순우 선생은 부석사를 두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이라고 극찬했다. 최 선생의 마지막 책 제목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때문일까. 사람들은 부석사에 닿자마자 높이 있는 무량수전에 오른 다음 푸근한 배흘림기둥(가운데가 둥그렇게 살짝 나온 기둥)을 쓰다듬는다. 부석사(浮石寺)란 이름의 유래가 된 커다란 '뜬 돌'은 무량수전 바로 옆이다. 얼핏 보면 가운데가 둘로 갈라진 편편한 돌덩이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 '갈라진 틈으로 실을 통과시키면 걸리지 않는다'고 적었다.

▲ 꿀사과란 별명에 걸맞게 물 많고 단 영주 사과. '단풍사과' 과수원에선 10월 말까지 사과 따기 기회를 제공한다.


부석사가 있는 부석면엔 사과 과수원이 지천이다. 빨갛고 커다란 사과 하나를 똑 따서 옷에 쓱쓱 닦은 다음 한입 깨물었다. '꿀사과'란 별명에 어울리게 물 많고 달다.

사과를 따서 바로 입에 넣을 수 있는 건 '단풍사과' 송영화 회장의 '현장 시식 무료' 방침 덕이다. 사과가 익는 10월 말까지, 현장에선 그냥 먹고 가져가는 것만 돈을 내라(1㎏ 5000원)는 것이다. 송 회장은 "대부분 예의를 지켜 1만원 어치 정도 사간다"고 했다.

사과 하나를 알차게 먹고 난 비앙카씨가 묻는다. "여기 선비마을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선비가 뭐죠?" 급히 휴대폰으로 검색해 뜻을 불러줬다.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 흙 묻은 바지에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사과와 맑은 공기는 공짜"라며 사과를 골라 주는 과수원 주인의 웃음소리가 단풍 같은 사과 사이를 감싸고 돈다. 문의 (054)633-3842·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902-1· www.dan-pung.com


자가용: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
대중교통: 서울 청량리역에서 오전 7시~오후 9시, 약 2시간 간격으로 기차가 출발하며 3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선비촌, 부석사 등을 둘러보려면 영주역보단 풍기역에서 내리는 게 편하다.


부석사 부근 영주축협한우프라자(경북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140번지·054-631-8400)는 규모가 크고 시설이 깨끗하다. 등심(A++) 200g 2만5000원, 갈빗살은 2만3000원. 정도너츠(경북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332번지·054-636-0043)는 쫄깃하고 고소한 생강도넛(1개 700원)으로 유명하다.

영주 선비촌에선 한옥 숙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옥 사이를 청사초롱 들고 걸으며 쏟아질 듯한 별을 감상하는 밤의 눈맛이 짜릿하다. 2인실 4만5000원부터.


영주시 풍기읍 남원천 주변에선 18일까지 '영주 풍기인삼축제'가 열린다. 문의 (054)635-0020· www.ginsengfestiv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