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꽃구름이 그려낸 천상화원을 거닐다
by조선일보 기자
2006.05.18 10:59:23
[조선일보 제공] “마치 하늘 꽃밭을 걷는 것 같아요!”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 분수령에 솟은 덕유산(德裕山·1614m)은 장쾌한 능선으로 이름이 높다. 겨우내 유명세를 떨쳤던 눈꽃이 사그라들면 해발 1500~1600m를 넘나드는 아고산대(亞高山帶) 덕유산 능선 마루는 고지대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들꽃 차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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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봉의 털진달래 군락지와 고사목. 아고산대인 덕유산의 털진달래꽃은 5월 20일쯤에 절정을 이룬다. 작은사진은 왼쪽부터 모데미풀·털진달래·처녀치마·족두리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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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 정상엔 탐방객들이 제법 많았다. 대부분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이용해 올라온 사람들이다. 곤돌라를 타면 힘이 부치는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도 어렵지 않게 높은 능선에 펼쳐진 하늘 화원을 거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덕유산은 삼공리 매표소에서부터 3~4시간 정도 다리품을 팔면서 올라야 제맛이다.
이 코스를 따르면 달빛 아래서야 제빛을 드러낸다는 월하탄(月下灘), 사바세계와 연을 끊는다는 이속대(離俗臺), 풍경소리 고즈넉한 백련사(白蓮寺) 등 무주구천동 33경 중 내구천동의 절경을 덤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주구천동 33경의 정점은 남한의 산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망을 자랑하는 향적봉. 정상의 바위에 오르면 동쪽으로는 가야산(1430m)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백두대간 첩첩 산줄기 이어진 남쪽으로는 지리산이 그리움처럼 아련하다.
하늘 화원을 이룬 아고산대의 봄을 만끽하기 위해 중봉(中峰·1594m)으로 방향을 잡는다. 뒤늦게 높디높은 산자락을 찾아온 봄의 여신은 백두대간이란 화폭에 고운 때깔을 입히는 중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과 구상나무의 짙은 녹색, 호랑버들과 신갈나무의 연둣빛 신록, 거기에 산기슭에 드문드문 자라고 있는 산벚나무의 연분홍 꽃구름이 그려낸 색상의 조화는 참으로 절묘하다.
산길은 육산(肉山)인 덕유산의 넉넉한 모습을 증명이라도 하듯 완만하다.
하지만 어디 걷는 데만 정신 팔겠는가. 풀숲을 들여다보면 앙증맞은 들꽃의 미소가 넘쳐나는데! 향적봉대피소 주변은 보랏빛 꽃을 피운 처녀치마가 지천이다. 허리를 굽혀야만 하는 결례(?)를 무릅쓰고 우아하면서도 요염한 자태를 카메라에 담는다.
처녀치마란 주름치마처럼 생긴 통꽃들이 고개를 숙인 듯 피어나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보통 낮은 산에선 3~4월에 피어나지만, 덕유산 같은 고지대에선 5월이 돼야 한창이다.
“어머, 저기 좀 봐! 하얀색 꽃도 있네!”
덕유산에서도 매우 드물다는 흰처녀치마를 본 이는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환호성을 지른다.
중봉이 가까워지자 샛노란 노랑제비꽃도 자주 눈에 띈다. 꽃의 생김새가 옛날 여인들이 예복을 갖추어 입을 때 머리에 쓰던 족두리와 비슷하다는 족두리풀도 많다.
낙엽을 조심스레 걷어내니 짙은 자주색 꽃송이가 드러난다. 정말로 족두리를 많이 닮았다. 이어 새하얀 만주바람꽃, 연노랑의 흰털괭이눈, 한국 특산종인 흰색의 모데미풀도 이따금 조용히 길손에게 손짓한다. 대부분 높은 지대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귀한 들꽃이라 황홀하다.
“와,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면 평생 후회할 뻔했네!”
가녀린 들꽃 구경에 정신 없던 중년 여인들은 다시 한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중봉 주변을 물들이기 시작한 털진달래꽃 때문이다.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같이 높은 산꼭대기에서 자라는 털진달래는 일반 진달래보다 무려 한 달쯤 늦게 꽃을 피운다. 꽃 색깔은 진달래보다 조금 더 붉은 편이다.
중봉에서 덕유평전(德裕平田·1480m)으로 내려선다. 털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펑퍼짐한 서쪽 사면은 산불이라도 난 듯 온통 붉은빛이다. 작은 몸뚱이를 날려버릴 듯한 거센 바람이 능선을 거칠게 넘나든다. “톡!” 바람결에 꽃송이가 떨어지는 소리일까? 아니, 털진달래 꽃봉오리 벙그는 소리다. 하늘 화원을 붉게 수놓는 중봉과 덕유평전의 털진달래꽃은 이번 주말인 20일쯤에 절정을 이룬다.
●가는 길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무주 나들목 → 19번 국도(진안·장수 방면) → 적상 → 49번 국가지원지방도 → 37번 국도(거창 방면) → 무주구천동. 무주 나들목에서 30분 소요.
● 산행길잡이무주구천동의 삼공리 매표소에서 향적봉을 다녀오는 코스는 산행시간만 6~7시간 소요. 입장료 어른 3200원, 청소년 1200원, 어린이 600원. 주차료 4000원. 노약자와 동행했을 때는 무주리조트에서 설천봉까지 운행(오전9시30분~오후 4시)하는 곤돌라를 이용하면 좋다. 설천봉에서 향적봉 거쳐 중봉까지 다녀오는 데 왕복 1시간30분 소요. 왕복권 어른 1만원, 어린이 7000원. 무주구천동~무주리조트 구간은 무료 셔틀버스가 1일 12회(오전5시40분~오후8시45분) 운행한다.
● 숙박(지역번호 063)덕유산 정상 부근에 있는 향적봉대피소(322-1614)에서 묵으면 향적봉의 일몰과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덕유산 들머리인 삼공리, 무주리조트 입구에 깨끗한 숙박시설이 많다. 덕유산국립공원사무소(www.npa.or.kr/togyu) 전화 322-3174, 무주리조트 322-9000.
● 맛집
삼공리 관광단지에 있는 원조할매보쌈(063-322-2188·사진)이 유명하다. 부드러운 돼지수육을 맛깔스런 배추김치에 싸먹는 맛이 일품. 두릅, 곰취 등 각종 봄나물을 비롯해 계란찜, 된장찌개 등 20여 가지 반찬이 나온다. 보쌈정식 1인분 1만원.
무주의 토속 음식은 어죽이다. 맑은 강물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푹 고아 뼈를 발라내고 고추장과 된장을 푼 다음 수제비와 쌀을 넣어 끓인다. 맛은 부드럽고 고소하다. 무주읍 내도리의 큰손식당(063-322-3605)이 잘한다. 1인분 5000원. |
글·사진=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