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대응과 중장기 식량 안보, 두마리 토끼 잡을수 있을까[현장에서]

by이명철 기자
2022.06.12 15:03:54

물가 안정 총력전…농식품부, 농축산물 수급 안정 총력
밀 등 곡물 자급도 낮아, 정황근 장관 “쌀 가공산업 활성화”
분질미 활성화 실효성 우려, 유통·판매체계 확보 시급

[세종=이데일리 이명철 기자] “쌀가루는 우리 식량 안보를 강화하고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데 실질적인 수단입니다. 식량주권 확보라는 국정과제 실천을 위해 쌀 가공산업 활성화 대책을 설명하게 돼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난달 10일 취임한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첫 브리핑으로 삼은 과제는 ‘쌀가루를 활용한 쌀 가공산업 활성화’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지난 8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쌀 가공산업 활성화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농식품부)


그런데 당장 밀 수입은 차질을 빚고 밀가루 가격이 뛰는 상황에서 굳이 지금 쌀가루 활성화를 전면에 내세운 시점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밀 자급률 제고와 식량 안보 대응도 중요하지만 지금 윤석열 정부의 급선무는 당장 치솟고 있는 소비자물가 안정이기 때문이다.

정 장관은 지난달 11일 취임식에서 가장 먼저 “밀가루를 대체할 건식 쌀가루 산업화를 핵심 프로젝트로 추진하겠다”고 밝히는 등 쌀가루(분질미) 활성화를 최대 역점으로 삼고 있다. 그는 지난 8일 브리핑에서도 “분질미는 농촌진흥청장 재임 시 세계 최초로 쌀의 분질 유전자를 발견해 개발한 품종으로 사실 퇴임 후에도 꾸준히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관심을 가져왔다”고 소개했다.

분질미는 일반적인 쌀과 달리 가루로도 활용이 가능한 품종이다. 이 품종을 2027년 20만t을 생산해 국내 밀가루 수요 약 200만t의 10%를 대체하겠다는 계획이다. “200만t의 밀가루를 먹기 위해 220만t의 밀을 수입한다. (밀 자급률 제고를 위해) 10년 이상 노력을 했어도 그렇다”는 게 정 장관의 지적처럼 밀 자급률을 끌어 올리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런데 윤 정부는 당장 급등하는 물가 잡기에 여념이 없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9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모든 부처는 물가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소관 분야 물가 안정은 직접 책임진다는 자세로 총력을 다해달라”고 주문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농축수산물 물가지수는 2020년 8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2020년 12월(8.9%)을 제외하곤 모두 두 자릿수대 전년동월대비 상승폭을 기록하며 고물가에 일조했다. 올 들어선 3월 0.4%에서 4월 1.9%, 5월 4.2%로 다시 상승세다.

농축수산물 물가가 오르면 가공식품과 외식 물가 등에 연쇄 영향을 미친다. 실제 지난달 외식 물가지수는 전년동월대비 7.4% 올라 1998년 3월(7.6%) 이후 24년 2개월 만에 최고 상승폭을 기록했다.

정황근(가운데)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지난달 23일 인천시 중구 대한제분 인천공장을 찾아 밀가루 수급 관련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특히 농식품부는 직접 소비되거나 가공식품의 원재료가 되는 농축산물의 수급 안정을 담당하는 물가 안정 최일선 부처다.

물론 농식품부는 지금도 농축수산물 할인 쿠폰이나 비료·사료 가격 안정 등 민생 대책과 농축산물 비축, 채소가격안정 지원 등의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육류 가격 상승과 관련해서는 수입 돼지고기 5만t에 0%의 할당관세를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밀 가격 상승으로 어려움이 예상되는 국민들과 소상공인에 대해서도 밀가루 가격 인상분을 국비로 지원하는 사업을 지원한다. 지금도 단기 대응에는 농식품부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27년 밀가루 소비 10%를 대체할 밀가루를 대체할 쌀가루 개발이 지금 농식품부의 중점 사업으로 발표돼야 하는지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 장관은 이번 대책의 기대 효과로 밀 자급률 제고와 함께 쌀 공급 과잉 해결을 제시했다. 쌀은 현재 자급률이 90% 이상으로 공급대비 수요가 적어 쌀값이 하락하는 문제가 있다. 물론 쌀이 주식인 국내 농업정책의 핵심 현안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현재 발생한 식량 위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1%에도 그치지 않는(2020년 기준 0.8%) 밀의 자급률 제고가 식량 안보 정책의 핵심인 것은 맞다. 쌀가루 활성화 사업이 미래 밀가루 수요를 대체해 밀 자급률을 끌어 올린다면 큰 성과로 남을 수 있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그간 십 수년 간 밀 생산 확대에도 별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지금 쌀가루 대책을 꺼내 효과를 볼 수 있겠냐는 것이다. 농지는 한정된 상태에서 기존 벼 재배농가와 밀 가공업체들의 참여가 관건이다.

이번에 농식품부가 발표한 쌀 가공산업 활성화 방안은 △안정적 공급을 위한 전문 생산단지 조성과 직불제 신설, 재배 안정성 강화 △산업화를 위한 공공비축제도, 전략 품목 및 가공·유통 기술 개발 △대량 수요처 활용, 수출 등 소비 기반 확대다. 이는 그동안 내놨던 밀 자급률 제고 대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20년 발표한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에서도 생산단지 확충, 체계적 재배 관리, 직불금 등 우대, 비축제도 운영, 대량·안정적 소비시장 확보 등으로 대상만 바뀐 수준이다.

결국 재배 확대의 대상이 ‘국산 밀’에서 ‘국산 분질미’로 바뀌면서 밀 재배단지 확충 등 기존 계획과 상충할 소지도 있다.

농식품부가 지난 9일 발표한 ‘쌀 가공산업 활성화 대책’ 추진과제(왼쪽)와 2020년 11월 발표한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 추진과제. (이미지=농식품부)


정부 계획을 보고 밀 재배에 나섰던 농가들이 정책 변경에 혼란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정 장관은 브리핑에서 밀 육성 계획과 관련해 “식량 계획을 하반기 발표할 텐데 변동이 있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밀과 분질미 이모작이 가능해 상호 보완할 수 있다는 게 정 장관의 설명이지만, 품종별로 정부 지원이 다르고 농가별 재배 기술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현 가능할 지 장담할 수 없다. 밀 자급률 제고 대책의 근본적 방법은 밀을 대체할 쌀 품종 재배가 아니라 농민들이 국산 밀 또는 밀 대체용 쌀을 자연스럽게 재배할 수 있는 유통 체계 확립이다. 밀 재배 농가들은 국산 밀 자급도나 낮은 이유는 재배가 아닌 판매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충남 부여에서 만났던 100t 가까운 밀을 재배하는 한 농업인은 “정부 수매로 밀 재배를 늘리기엔 한계가 있고 판매처와 유통망을 넓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밀을 재배하다가 몇 년 전 다른 품종으로 전환했다는 상주의 농업인은 “밀 재배가 어려운 게 아니라 안정적으로 팔 곳이 없었다”고 전했다.

밀 수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분질미를 개발하고 상용화를 실현하려는 정 장관과 농식품부 노력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과 같은 엄중한 경제 상황에 취임했다면 단순 현장 방문이 아닌 현안 해결에 진력을 쏟아야 할 때다. 그리고 번번이 무산됐던 국산 밀 활성화 대책이 왜 실패했고, 개선 방안은 무엇인지부터 들여다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