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김지하 시인 애도…“진영논리 따위 몰라, 시대의 위안이었다”

by김미경 기자
2022.05.09 10:07:05

1년여 투병 끝에 자택서 숨져..향년 81세
군사독재에 맞서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남겨
반독재 투쟁했지만, 훗날 ‘변절’ 논란
시인 류근·나태주·임동확·이시영 등 추모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작품을 남긴 김지하 시인이 8일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각계에서 그를 추억하고 애도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김지하 시인은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주목받았지만, 1991년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이어진 학생·청년들의 분신 자살을 질타하는 칼럼을 ‘조선일보’에 실으면서 민주화운동 진영과 갈라서게 됐다. 2012년 대선 때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해 ‘변절’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이를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류근 시인은 김 시인의 별세 당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진영 논리 따위 모르겠다. 영욕과 애증, 탁월한 서정시인으로 기억한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1년여 투병 끝에 별세한 김지하 시인의 생전 모습(사진=뉴시스).
그는 이어 “1970~80년대 그 피바람 부는 시대에 그의 시는 그대로 구원이고 위안이었다”며 “고딩 때 금서로 묶여있던 시집 ‘황토’와 ‘타는 목마름으로’를 숨어서 읽었고, 치기에 일렁이던 청춘의 골방에서 깡술을 마시며 그 노래를 불렀다. 지구가 자꾸 가벼워지는 봄이다. 눈물겹다. 시인 김지하 선생님의 평화로운 안식을 기원한다”고 했다.

나태주 시인은 “시인이기도 했지만 한 시대의 등불로서 자기 역할을 하신 분”이라며 “고생 많이 하시다 가셨으니 거기서는 평화롭게 아프지 말고 다툼 속에서 힘들지 말고 평화롭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애도했다.

임동확 시인은 “김지하는 한 시대의 정신이었다”고 회고하면서 “한국문학, 한국 민주주의는 김지하에게 빚진 바가 적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장 널리, 많이 알려진 작가 중의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가장 몰이해되거나 오독되고 있는 작가 중의 한명”이라고 썼다.



이시영 시인은 “온갖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김지하 시인이 오늘 영면하셨다”며 “부디 저세상 건너가시가던 새벽이슬 젖은 아름답고 고운 꽃망울 많이 피우소서”라고 적었다.

토지문화재단에 따르면 고인은 최근 1년여 동안 투병 생활을 한 끝에 8일 오후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1세.

고인의 본명은 김영일이다. 필명 ‘지하’는 고인이 서울대 미학과 재학 시절인 1963년 22세에 시화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직접 지었다. 재학시절 4·19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그리고 6·3사태를 겪으면서 학생운동에 깊게 관여했다. 1969년 11월 시인지에 ‘황톳길’을 통해 공식 등단했으며 1970년 5월 사상계에 풍자시 ‘오적’(五賊)을 발표해 필화사건을 겪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떠올랐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지고 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자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칼럼을 기고해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다. 진보 진영에서는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 시인은 10년 뒤 ‘실천문학’ 여름호 대담에서 칼럼과 관련해 해명하고 사과의 뜻을 표명했으나, 2012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하는가 하면 진보 문학평론가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노골적으로 매도하는 등 혼란스러운 행보를 보였다가 2018년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마지막으로 절필 선언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인 김원보 작가·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등이 있다. 김지하 시인의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1일이다. 장지는 부인이 묻힌 원주 흥업면 선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