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 백제 무왕, 1500년 만에 깨어나나

by이정현 기자
2018.07.18 09:00:17

익산 쌍릉서 발견한 인골 분석 결과 발표
조선총독부 졸속 발굴 후 100년 만에 재조사
첨단기술 총동원해 ‘주인 찾아라’
남성 노년층… 사망 시기 및 골형태로 무왕 추정

익산 쌍릉 발굴조사 현장(사진=이정현 기자)
[이데일리 이정현 기자] 익산 쌍릉이 고대왕국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를 열었던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커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는 지난 4월 익산 쌍릉(대왕릉)에서 발견된 인골에서 남성 노년층의 신체특징과 병리학적 소견을 확인했다고 18일 밝혔다. 그동안 쌍릉은 백제 시대 말기의 왕릉급 무덤이며, 규모가 큰 대왕릉을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의 무덤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했다. 이번 인골 분석 결과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왕은 백제 30대 왕으로 삼국유사 속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 말기 백제의 왕으로서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빼앗고 왕권을 확립하는 등 백제의 마지막 전성기를 연 왕으로 평가된다.

쌍릉의 존재는 ‘고려사’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충숙왕 때(1327년) 도굴되었다는 사건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부터 고조선 준왕이나 백제 무왕의 능이라는 설이 있었다. 1917년 조선총독부는 쌍릉을 단 며칠 만에 발굴하면서 백제 말기의 왕릉이거나 그에 상당한 자의 능묘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1920년 고적조사보고서에 단 13줄의 내용과 2장의 사진, 2장의 도면만 공식기록의 전부로 남겨놓았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8월부터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의 하나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익산시와 공동으로 쌍릉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석실 끝 부분에서 여태까지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없던 인골 조각이 담긴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100년 전 일제가 발굴하면서 다른 유물들은 유출한 반면 이는 꺼내가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 인골자료가 무덤의 주인과 연결된다면, 백제 무왕의 능인지를 결정짓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고고학과 법의인류학·유전학·생화학·암석학·임산공학·물리학 등 관련 전문가들을 모두 참여시켜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의 수종 등을 정밀 분석했다.

102개의 조각으로 남아있던 인골을 분석한 결과 인골의 주인은 남성인 것으로 나왔다. 팔꿈치 뼈의 각도(위팔뼈 안쪽위관절융기 돌출양상), 목말뼈(발목뼈 중 하나)의 크기, 넙다리뼈 무릎 부위(먼쪽 뼈 부위)의 너비가 남성일 확률이 높다고 봤다.



넙다리뼈의 최대 길이를 추정하여 산출한 결과 키는 161㎝에서 최대 170.1㎝로 보인다. 19세기 조선 시대 성인 남성의 평균키가 161.1㎝인 것을 감안한다면 비교적 큰 키다. 무왕은 ‘삼국사기’에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고 표현되어 있다. 639년에 작성된 ‘미륵사지 서탑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대왕폐하’로 불린 기록도 있다.

나이는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목의 울대뼈가 있는 갑상연골에 골화가 상당히 진행되었고, 골반뼈 결합면의 표면이 거칠고, 작은 구멍이 많이 관찰되며, 불규칙한 결절이 있다.

남성 노년층에서 발병하는 등과 허리가 굳는 증상(광범위특발성뼈과다증), 다리와 무릎의 통증(정강뼈와 무릎뼈의 척추외골화)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옆구리 아래 골반뼈(엉덩뼈능선)에 숫자 1 모양으로 골절되었다가 치유된 흔적이 있다. 어긋나지 않아 타격보다는 낙상 등 때문으로 판단된다. 치료기간은 3개월 정도로 직접적인 사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가속 질량분석기(AMS)를 이용한 정강뼈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보정연대가 서기 620~659년으로 산출되어 인골의 주인은 7세기 초중반의 어느 시점에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

뼈가 심하게 부식되어 유전자 분석은 쉽지 않았다. 추출한 콜라겐의 탄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으로 벼, 보리, 콩 등의 섭취량이 높았음을 알 수 있었고,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으로는 어패류 등의 단백질 섭취의 가능성도 확인했다.

익산은 질 좋은 화강암의 산지로 유명한데, 석실의 석재는 약 9㎞ 떨어진 함열읍에서 채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령이 400년 이상으로 알려진 관재는 늦어도 7세기 전반 이전에 벌목된 것을 가공한 것이다. 목관은 최고급 건축?가구재인 금송으로 제작했으며, 이번에 발견된 유골함은 잣나무류의 판자로 만들었다.

문화재청은 600년에 즉위하여 641년 사망했다는 무왕의 재임 기록으로 보아 10대나 20대에 즉위한 경우 무왕의 사망 연령이 남성 노년층으로 추정되는 쌍릉의 인골 추정 연령과 비슷하며 사망 시점이 7세기 초반부터 중반 즈음이라는 인골 분석 결과는 익산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같은 시기에 왕권을 확립한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가능성을 한걸음 더 보여준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