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섬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 왔다네
by한국일보 기자
2007.02.23 13:10:00
[한국일보 제공] 남쪽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봄이 왔단다. 유난히 따뜻했던 겨울이었기에 그리 간절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다. 봄이 “내가 왔소이다”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법은 기온과 색, 두 가지다. 따뜻함이 언 땅과 흰 눈을 녹인다면 무채색의 삭막한 겨울을 지워내는 것은 화사한 신록과 꽃이다.
봄을 여는 꽃은 동백이다. 여느 꽃 피고 지는 봄, 여름을 마다하고 찬바람 부는 겨울 저 홀로 핏빛 선연한 꽃봉오리를 맺는 정열의 꽃이다. 봄의 훈풍이 살랑이는 경남 거제의 지심도로 동백을 만나러 떠났다.
이른 아침 거제 장승포항을 출발한 배는 고요한 바다를 가로지르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배의 오른편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인 거제의 해안선이 계속 따라온다.
20분도 안돼 도착한 지심도 선착장. 부두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약간의 경사로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동백이 서둘러 마중을 나왔다. 비탈길을 오르는 수고로움은 만개한 동백의 아름다움에 금세 잊혀진다.
머리 위 동백나무에도, 길 바닥에도, 민박집 슬레이트 지붕과 마당의 널찍한 평상 위에도 붉은 동백이 화려한 수를 놓고 있다. 아침에 청소를 했는지 마당 한쪽에 모아놓은 비질의 부산물도 온통 떨어진 동백꽃 뿐이다.
동백은 두 번 핀다. 진초록의 나뭇잎 위에서 한번 피고 ‘후두둑’ 떨어져 바닥에 또 한번 피워낸다. 밑동이 붙은 다섯장의 꽃잎이 가장 아름답게 입을 벌린 순간, 꽃봉오리는 ‘툭’하고 통째로 떨어진다. 아무런 미련 없이 스스로 단절하는 그 모습에 누군가 ‘떨어진 동백은 낙화(落花)가 아니라 절화(折花)’라 이야기했다.
갈 짓자로 이어지는 길이 민박집들을 거의 벗어날 즈음 폐교가 나타난다. 옛 지심분교였던 곳이다. 나무로 지은 소담스러운 교사(校舍)와 아담한 운동장이 마음을 빼앗는다. “이렇게 아늑할 수가.” 이곳에도 동백 카펫이 깔렸다. 운동장의 겨우내 바짝 말라붙은 잡초 위로 우수수 떨어져 있는 동백들.
학교를 지나 섬의 북쪽 전망대로 이어지는 길이 깊은 숲속으로 안내한다. 거대한 동백의 숲이다. 수십, 수백 년 된 동백나무들이 세월의 굴곡을 온 몸으로 표현하며 숲의 공간들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푹신한 오솔길에 떨어진 붉은 동백꽃 사태에 걸음이 섣불리 나아가질 못한다. 아무도 없는 동백숲. 인적 없어 고요한 이곳에 우두커니 서있으니 속닥거리는 생명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동박새 등 새소리 붉은 동백꽃 위로 퍼져나가고, 댓잎과 동백잎을 스치는 바람소리엔 초록의 향이 짙다. 봄의 소리, 생명의 울림이다. 굴곡진 동백나무처럼 봄의 울림이 꿈틀꿈틀 숲 안을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