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하지나 기자
2024.10.08 08:45:55
고려아연 자사주 매입, 경영권 방어 유일 수단
기업가치 훼손, 자금 여력 줄어 투자 실기 우려도
치킨 게임에 시장 왜곡..주주 피해 가능성 커
[이데일리 하지나 기자] ‘피로스의 승리’
많은 희생을 치른 승리를 말한다. 사실상 패배와 다름 없는 승리다. 고대 그리스 에피루스의 왕 피로스는 로마와 헤라클레아 전투, 아스클룸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피해가 컸다. 로마군에 두번째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는 “우리가 로마군과 한 번 더 싸워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라고 했다.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영풍그룹이 국내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와 손을 잡고 공개매수를 통한 경영권 인수 시도에 나서자 고려아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자사주 매입 카드를 꺼내 들었다. 양측이 경영권 다툼에 쏟아붓는 자금만 5조원이 넘는다. 아직 이들의 승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과연 이 싸움 끝에 웃음 짓는 승자는 있을까.
MBK·영풍이 고려아연의 자사주 매입가격인 83만원과 동일한 가격으로 재차 공매개수 가격을 상향하면서 고려아연이 또다시 자사주 매입가격을 끌어올릴 가능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회사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회사 자금을 쏟아붓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경영권 방어 장치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이같은 결정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해외 주요국에 있는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이나 ‘차등의결권’ 등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사주 매입은 거의 유일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다.
문제는 이번 경영권 분쟁이 단기간에 끝나기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다. MBK·영풍은 공개매수 최소 매수 여건인 ‘지분 7%(144만5036주)’을 삭제했다. 1주라도 공개매수에 응한다면 이를 매입하겠다는 것이다. 영풍그룹 및 장형진 등 장씨 일가 33.13%, 최윤범 등 최씨 일가 및 우호지분 32.04% 등 지분율 차이가 불과 1% 내외인 상황에서 장기전으로 끌고 가겠다는 심산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이 과정에서 훼손될 고려아연의 기업가치다. 고려아연의 온산제련소는 매년 64만톤 이상의 아연을 생산한다. 이는 단일제련소 기준으로 세계 최대 생산량이다. 지난 2분기 고려아연 매출액이 3조581억원으로 분기 최대 매출액을 기록했으며, 영업이익률은 8.8%에 이를 정도로 우량한 회사다. 하지만 이미 상호 비방전으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진흙탕 싸움이 됐다.
특히 경영권 방어에 집중한 나머지 자금 여력이 줄어들고 재무 부담이 가중되면서 자칫 투자 시기를 놓치거나 향후 투자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크다.
고려아연은 2033년까지 제련 사업에 5조원을 투자해 매출액을 13조원까지 끌어올린다고 밝혔다. 이어 신재생에너지·2차전지 소재·자원순환 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신성장 사업 ‘트로이카 드라이브’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33년까지 12조원을 투자, 12조20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양측의 치킨게임으로 기업 본래 가치와 무관하게 시장도 크게 왜곡됐다. MBK가 공개매수를 공시한 전날인 지난달 12일 55만6000원이었던 고려아연 주가는 지난 4일 77만6000원까지 상승했다. 불과 3주만에 40% 가량 상승한 것이다. 향후 시장이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투자자들과 주주들이 입게 될 피해는 불보듯 뻔하다.
장씨 일가나 최씨 일가 모두 50년간 키워온 고려아연이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누가 이기더라도 상처뿐인 승리가 자명하다면 싸우지 않고 모두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