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노컷뉴스 기자
2007.02.01 10:50:00
[별별인터뷰]''그놈 목소리'' 설 경 구
2000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연극배우 출신 설경구. 송강호, 최민식과 함께 충무로 '빅3' 배우로 손꼽혀온 설경구가 '그놈 목소리'에서 그동안의 밑바닥 인생 이미지를 벗고 시청자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앵커로 변신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 순간, 하나뿐인 아들을 유괴당한 뒤 한 조각 웃음조차 머금지 못할 정도로 한없이 작아진다.
1991년 이형호 유괴살해사건이 소재인 '그놈 목소리'는 부모의 애끓는 심정을 담은 영화로 1일 개봉한다.
설경구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생경한 경험을 했다. 그동안 밑바닥 인생 혹은 주변인만 연기해온 그로서는 피부과를 찾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 체중 조절 말고 외형에 신경써본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박진표 감독의 데뷔작) '죽어도 좋아'를 보고 지독한 사람 같아서 궁금했다. 그래서 사건자료만 받은 상태에서 작품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내가 앵커인지 나중에 알았다. '어, 뭐야. 내가 왜 앵커야' 싶었지. 날 데리고 앵커를 하려 했으니 참."
제작 초반, 설경구가 캐스팅된 사실이 알려지자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유괴범'으로 오해했다. 그 정도로 설경구의 이미지는 화이트칼라인 앵커라는 직업과 상극을 이루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보다는 외형에 더 신경을 썼지. 피부과 다니면서 잡티 제거하고 얼굴 관리 받고 머리 단정하게 하고. 난 (피부과에서) 치료 받은 적이 없어. 근데 잡티를 제거했더니 곰보처럼 된 거야. 얼마나 불안했는데. 잘못돼서 꺼멓게 굳어 버릴까봐."
더구나 영화의 첫 장면이 뉴스보도라 더욱 긴장됐다.
"팍 하고 나왔는데 으악 하면, 날 앵커로 안 받아들이면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 거잖아. 근데 그걸 또 크랭크인 날 찍었네. 얼마나 긴장돼."
결과적으로 말하면 설경구는 앵커처럼 보인다. 공들인 보람? 있다.
"사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다. 평소 궁금해 하던 사람과 영화 찍어서 좋다.거기까지! 영화 잘 만들어서 범인을 잡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냥 영화 잘 찍자, 근데 찍으면서 머리가 돌더라."
'그놈 목소리'는 설경구가 오랜만에 자학하며 찍은 영화다. 옛날에도 촬영하다 안 풀리면 자학을 했지만 이번에는 그 강도가 좀 셌다.
영화에선 편집된 장례식 장면을 찍을 때다. 설경구는 촬영지인 충북 제천 화장터로 당일 아침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박 감독이 전화를 해왔다. "야, 부모가 온정신이었겠냐?" 그냥 툭 던진 한마디에 설경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내려가서 의상, 분장 다 깨워서 분장해줘, 의상 줘, 그러곤 술을 마셨다. 그런 뒤 숙소 주변을 돌아다니다 새벽에 방으로 돌아가 매니저를 앞에 앉혀놓고, '너, 나 자게 하면 죽는다'하곤 밤을 꼴딱 샜다. 술은 안 취해, 비몽사몽, 그냥 멍해. 그런 상태로 나를 카메라 앞에 집어넣었다."
돈 가방을 들고 잠실 롯데월드 앞을 달리는 장면, 마지막 엔딩을 장식한 뉴스보도 장면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감독이 물어. 컨디션 어때? 헉, 몰라! 그러면 오케이였다."
한편으론 감독의 무조건적 고집에 큰 자극을 받았다. "(감독이) 자기 입으로 이번 영화 찍다가 본성이 다 까발려졌다고 했다. 왜냐하면 범인이 (피해 부모를) 움직이게 한 장소 있잖아. 금호터널 앞이나 현대백화점, 그리고 H아파트 놀이터. (감독이) 그 장소에서 찍고 싶어 했다."
그러다보니 교통체증이 심한 서울 시내에서 차량을 막아놓고 영화를 찍는 게 다반사였다. "재연드라마도 아니고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하나둘씩 포기하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뭔가를 포기하게 돼. 대낮에 차 다 막아놓고 무슨 짓이야. 뒤에 있는 사람들은 사연도 모르고 기다리는 거잖아. 하지만 고집을 피우니까 사람에 대한 믿음이 확 갔지."
설경구는 한마디로 박진표 감독의 지능적인(?) 괴롭힘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피해 부모가) 밥은 먹었겠냐?' 오케이! 안 먹어! '잠은?' 안 자, 안 자고 왔어! '나 죽어도 이 신 포기 못해. 지친 거 다 아는데 그래도 포기 못해' 그럼 '오케이, 가봐! 갈 때까지 가봐! 우리 또 그런 거 좋아하잖아." '그놈 목소리' 그렇게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한 장면씩 치열하게 완성됐다.
설경구는 명실공이 영화계의 톱스타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톱스타의 삶을 산 적이 없다.
일생생활은 거의 '80년대 풍'이었다. "촬영이 끝나면 몰아서 술을 먹어. 거의 매일. 일에 대한 보상이 술이었지. 여행도 없었어. 운동도 끝! '실미도' 할 때 매일 8㎞씩 뛰었어. 찌면 안 되니까. 전화도 안 받아. (촬영에) 너무 집중해. 하지만 끝나는 순간 푹 퍼져."
그야말로 삶이 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개인생활이라곤 없었다. "개인생활이 그 지경이었지.(웃음) 나한테 투자한 게 아무것도 없어. 정신도 혼미하고 몸도 지친 상태에서 (다음 영화) 준비에 들어간 거야."
그랬던 설경구가 달라졌다. "너저분한 게 싫어졌어." 박진표 감독의 조언도 한몫했다. "(박진표) 형도 그런 말을 했지. 아무 거나 입고 다니지 말라고. 그렇다고 별거나 입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옷을 차려입으면 좀 긴장하잖아. 생각이 조금 바뀐 거지."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나이가 먹은 탓도 있을 테고, 지난해 공식 정리된 가정사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다만 어느 순간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니 내가 망가지고 있더라." 설경구는 이 날도 오전에 운동을 하고 인터뷰에 왔다.
"'그놈' 찍다가 10kg 빠졌어. 예전 같았으면 원상 복귀됐을 거야. 70kg 후반 몸무게로. 내가 기특한 게 지난 해 연말을 넘기면서 술은 매일 안 먹었어. 먹더라도 다음 날 기어서라도 헬스장 가고. (몸매를) 유지시킨 거지." '그놈 목소리'의 한경배 앵커는 MBC의 '엄기영'처럼 유명한 앵커다.
하지만 아들을 유괴당한 뒤 자신의 삶을 곱씹게 된다. 설경구도 한경배처럼 자신의 삶을 재점검했다. 생각의 전환은 태도의 변화로 이어졌다. 그는 앞으로 자학을 하더라도 즐겁게 할 생각이다.
"자학이란 걸 힘들게 하잖아. 주위에서도 보기 힘들게. 그걸, 하더라도 즐겁게 하고 싶어. 근데 바뀌면 얼마나 바뀌겠어." 하지만 그는 이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그놈 목소리' 엔딩장면에 대해 일각에서 작위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대해 설경구는 말한다. "절대 작위적일 수 없다. 나도 상상이 안 되는데 그런 일 당한다 생각하면. 다만 우리가 생각한 최대한의 방법대로 한 거다. (박)진표 형이 그랬다. '오늘 내일 안 되면 몇 달이 걸려도 찍을 거야. 영화 개봉 안 해도 돼'."
설경구는 엔딩장면을 이틀간 찍었다. 첫 날 촬영이 마음에 안 들어 밤새 술 먹고 강남에서 여의도 63빌딩까지 걸었다. 찍다보니 울음이 터졌다. 대사도 뒤죽박죽됐다."
고통스러웠다. 근데 부끄럽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 부모 마음을. 몇 달 지나자 나도 정리가 돼 가. 촬영할 때는 막 아팠을지 몰라도."
설경구는 딱 잘라 말한다. "농담 따먹기 했음 안 나갔지. 방송을 보면 알겠지만 감동의 오락프로가 됐다."
설경구는 덧붙인다. "방송 출연해 흥행되면 다 나가겠어. 근데 안 되잖아. 내가 농담 따먹기 잘하고 그걸 즐기면 나가. (김)수로나 (차)승원처럼. 난 못 즐겨. 싫은 게 아니라. 근데 방송하는 사람들 대단한 거 같아. 프로야 프로. 이번에 (그들을 보면서) 많이 느꼈다."
"그게 서울극장인가, 무대인사 대기하고 있는데 누가 칼 들고 와서 (박)진표 형을 찔렀어. 범인임을 직감하고 싸우다가 손목이 나갔어. 잡긴 잡았지, 꿈에서. 언론 시사 전날에는 살인범에게 쫓기는 꿈도 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