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기환의 홍보에 울고 웃고)‘사장’과 ‘부장님’

by문기환 기자
2007.05.16 10:27:41

[이데일리 문기환 칼럼니스트] 외국영화가 강세를 보이는 요즘 충무로에선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고 한다. 영화보다 리얼하고 재미있는 상황이 연일 벌어져서 도저히 보다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만들 자신이 없다는 다분히 냉소적인 우스갯소리다. 사실 우리 국민들은 희대의 코미디를 10여일 넘게 실제 상황으로 목격하고 있다. 대기업 회장의 보복 폭행 드라마가 그것이다. 진실은 법정에서 밝혀 지리라 기대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정황으로 보면 아무래도 무죄가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아직 종결되지 않은 이 드라마 초반부에 가슴이 편치않은 슬픈 장면도 하나 있었다. 자칫 묻혀질 뻔한 사건이 모 언론을 통해 크게 보도된 후 며칠 지나지 않은 때였다. 아직 경찰 수사가 본격화 되지 않아 피의자인 회장이 조사를 받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해당 그룹의 임직원들이 발 빠르게 회장 구명을 위한 탄원서를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제목과 내용도 없는 종이에 성명과 주소난만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초유의 백지 탄원서인 셈이다. 그런데 그룹 홍보실에선 일부 계열사 직원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지 절대 지시 사항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이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8년 전 가을, 이 땅에는 또 다른 한편의 코미디가 있었다. 모 일간지의 사주가 자신 소유의 별도법인에서 거액의 탈세 혐의를 받아 검찰청에 조사를 받으러 가는 실제 상황이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작렬하는 가운데 보무도 당당히 검찰에 출두하는 피의자를 향해 소속 언론사 기자들이 한 데 모여 사전에 연습을 한 듯이 일제히 “O사장, 힘 내세요!”라고 외치는 그 장면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필자를 놀라게 한 점은, 그들이 사장을 향해 ‘O사장님’이라고 하지 않고 ‘O사장’ 이라고 호칭했다는 점이다. 물론 언론사 내부에서는 부장, 국장들에게 ‘님’ 자를 부치지 않는다는 말은 진작에 들었지만 설마 사장에게 까지 적용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필자가 (주)대우의 홍보과장이던 시절이니까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A부장이 기획과 홍보업무를 겸임하는 부서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해외지사 근무와 국내 무역영업 경력을 골고루 갖춘 그는 당연히 홍보에 대해서는 경험이 일천했다. 그래서 과장이던 필자에게 홍보업무를 대부분 일임했었고, 특히 언론사와 기자들과의 관계는 필자의 조언을 대부분 그대로 수용했었다. 다행히 그는 십수년을 무역영업으로 단련돼 있어서인지 대인 관계가 원만해 언론 기자들과의 만남의 경우도 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 일간지의 B기자가 종합상사를 신규로 담당하게 됐다고 인사차 필자의 부서를 방문했다. 통성명을 하며 얘기를 나누던 중, B기자가 A부장의 대학 후배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이후, 두 사람은 특별히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불편한 관계는 전혀 아니었다. 그 일이 생길 때까지는 말이다.

당시 7개의 종합상사들은 ‘수출보국의 첨병’이라는 동질 문화권 아래 정보교환과 친목도모를 위해 일종의 협의체를 구성하고 있다. 정기적인 회의도 하고 체육대회도 돌아가며 주최하곤 했다. 그 중에 중요한 행사가 매년 1회씩 출입기자와 함께 해외 주요 수출지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종합상사 측에서는 보통 기획업무를 담당하는 부장급이 참가하는데 ㈜대우에서는 A부장이 출장을 다녀오게 됐다.

문제는 1주일 여에 걸친 해외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발생했다. 별다른 사고도 없었고 현지에서 나름대로의 성과도 얻었으니 무난한 해외출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귀국 후의 A부장 표정이 영 아니었다.

마침 며칠이 지난 후 회식자리가 있어서, 술자리 분위기를 빌려 슬쩍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답변이 B기자에게 무척 실망했다는 말이었다. 무슨 얘기냐고 재차 물어봤더니, 해외 방문국 공항에 도착하여 서로가 자기 여행가방을 찾고 있었는데, 벌써 가방을 찾았는지 멀리 떨어져 있었던 B기자가 자기를 향해 그 쪽으로 오라는 듯이 “A 부장” 이라고 크게 외치더란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순간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한다.

이유는 “어떻게 대학 선배인 자기에게, 그것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님’자를 뺀 채 ‘부장’이라고 호칭하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원래 언론사에서는 직급에 ‘님’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에 B기자도 언론사에서 쓰던 호칭을 무심코 쓴 것으로 보인다”고 A부장을 애써 달랬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그 때 이후 A부장과 B기자는 서먹서먹한 관계를 지속했고, 끝내 앙금을 풀지 못한 채 A부장이 다시 영업 분야로 복귀하는 것을 계기로 종결되고 말았다.

필자는 B기자가 당시 상황에서 보통 일반사회에서의 관행처럼, A부장을 ‘부장님’이라고 불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요즘도 가끔씩 만나는 B기자에게는 아직도 그때 그 얘기를 꺼내기가 망설여진다.